친구의 외마디 비명이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친구는 요즘 들어서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가슴이 답답한 게 풀리지 않는 문제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원인이라도 알면 속 시원하게 해답을 찾기 위해 행동이라도 하겠건만 이것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제로 미치겠다고 한다. 그러고서는 나에게 되물었다. "너는 요즘 행복하냐?" 저 물음에는 어떤 의도로 물었는지 알 것만은 같았지만 속 시원하게는 대답해주지는 못했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을 다르니깐. 다만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정형적인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한때 행복을 찾아 헤매었을 때가 있었다. 처음의 시작은 돈이 목적이 되어 삶의 방향은 돈을 벌기 위해 또는 돈을 아끼기 위해 초점을 맞췄을 때였다. 그때는 쓰지도 않고 아끼고 아껴서 시드머니를 모으기 위해 발악했었고 그렇게 모았던 돈을 투자를 하면서 불러 나갔었다. 그때는 그것이 나의 유일한 행복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무색해질 만큼 초라해지고 말았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친구들의 여행사진, 연인들과 함께하는 모습, 행복해 보이는 표정들. 그 앞에서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살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럼에도 버티고 버텼는데 댐에 가두어 두었던 물이 예기치 않는 폭우로 범람하듯이 결국은 무너지고야 말았다. 그렇게 나 또한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라는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 하며 1년을 보이지 않는 답을 찾아 헤매며 방황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친구가 사는 이야기를 엿들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삶에 대하는 태도가 남 달랐던 것 같다. 남과 비교하지도 않으며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친구였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 대해서도 만족도도 높았으며 그렇다고 많지 않은 월급에 대해서 불평하기보다는 월급으로 자기 계발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만족하며 사는 친구였다. 그런 친구를 보면 되물었던 적이 있다. "그렇게 살면 나중에 노후준비가 안되지 않아?" 그 친구의 대답은 "괜찮아. 나는 부자가 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느끼면서 살고 싶어. 물론 부자가 되면은 좋지만 그것보다는 지금 이 순간이 내게 더 소중하니깐 그래. 그리고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안정적인 직장을 다녀서 그런가? 월급은 적더라도 그 월급으로 좋아하는 것들도 할 수 있고 조금씩 돈을 모아서 집도 사고, 나중에 연금이랑 적금으로 노후를 맞이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아도 소탈하게 사는 게 나에게 있어서는 행복이야. 그러니깐 너도 너무 아등바등 살지 않기를 바란다. 뭐 사람마다 사는 게 다 다르니깐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그 친구를 보면서 나는 이상과 현실의 갭이 크기에 거기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행복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남과 비교하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살다 보면 남과 나를 비교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 누구라도 예외 없이 그러한 경험들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요즘 들어 소셜미디어가 발달하다 보니 보여주기 식의 삶이 사회의 문제점으로 화두가 되기도 했었다. 다른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는 모습들이 소셜미디어에 사진이나 영상으로 업로드가 될 때면 문득 자신의 삶이 초라해 보일 때가 있으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알고 보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다 거기서 거기일 텐데 말이다.
계속해서 남과 비교해하며 자존감을 갉아먹기보다는 상대를 바라보는 눈을 초점을 달리하여 자신을 차분히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신의 강점이 무엇인지. 나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차피 남의 떡이 아무리 커봤자 내가 가질 수 없는 노릇이니 안 되는 일에 목메고 연연하기보다는 그 시간을 자신에게 온전히 쏟아봄으로써 자신을 가꿔가는 게 더 중요하며 행복에 대한 기준을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복하고 싶다고 생각에 행복하지 않았던 날들을 돌이켜보니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오히려 행복으로 가는 길이지도 모르겠다고 어렴풋이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