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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도 Aug 22. 2019

#7, 마지막 자살자이기를 소망하며

경찰, 현장 속으로 7회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908161522051&code=115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손 내밀어 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뉴스는 수도 없이 보았지만, 자살률 1위라는 건조한 막대그래프를 보는 것과 실제 자살한 사람을 두 눈으로 목도하는 건 결코 같지 않았다. 사람은 늘 죽었거나 죽고 있으며, 이에 벼락같이 놀랄 필요도 없다. 생과 사는 영화에서 다루는 것처럼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삶의 한 부분이다. 그렇다곤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아침에 눈 떠서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고, 각자의 방법으로 돈을 벌며 중간중간 배설을 하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밤에는 잠드는 일에 사표를 던지다니. 무슨 사연이 있길래 꽉 묶인 신발끈을 풀고 발걸음을 멈추었나.


우리나라 10대 사망원인 1위는 자살


비트코인이 1000만원을 호가하자 가상화폐 거래소는 투기하려는 사람이 몰려 신규계좌 개설조차 쉽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고 추락했던 비트코인 가격이 최근 회복세를 보인다는 뉴스가 간간이 보이기는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닐 터다. 투기판이 그렇듯 돈을 번 사람보다 잃는 사람이 더 많다. 그 여파는 전국을 돌고 돌아 우리 경찰서에까지 도달했는지, 코인에 실패해 감당하기 힘든 빚을 진 청년들이 자살했다는 신고가 심심찮게 들어왔다. 내가 본 것만 3건이 넘었다. 나이는 대부분 20대 초반. 혹자는 쉽게 돈 벌려고 하다 책임지지 못할 상황이 닥치자 도망친 것 아니냐는 말을 뱉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저 묵념만 해주기로 했다. 이미 넋은 떠났으므로.


80대 할머니가 학교 운동장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손수 밧줄을 준비해 아이들이 뛰어노는 학교까지 갈 때의 심정을 감히 헤아릴 수나 있을까. 할머니에게 묻고 싶은 말이 참 많지만 들을 수는 없었다. 생전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마지막 눈 감는 장소를 학교로 고른 것일까. 그 시절 여자들의 인생이 대부분 그랬듯이 이 악물고 살아오셨을 텐데 이젠 악물 이도 남지 않으셨던 걸까. 문득 ‘아버지의 피 묻은 틀니를 가져가려는 자식이 없어 무슨 전염병 만지듯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쓰레기통에 버렸다’던 최영미 시인의 시 구절이 생각났다.


우리나라 10대 학생들의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란다. 이 죽음을 과연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었다’는 자살로 부를 수 있을까. 성적 압박, 교우관계 실패, 학교폭력이라는 외부적 요인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죽음을 택한 아이들에게 적합한 단어가 아닌 것 같다. 자살을 가장한 타살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어느 고등학생의 ‘나는 살 가치도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봤을 때 느꼈던 이질감이 떠오른다. 스스로를 가치 없는 삶이라 여기게 만든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목숨은 끊어졌고 유품은 소각될 것이며, 그 아이가 세상에 살았다는 것은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말고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 퍽 쓸쓸한 이유가 그것이다. 사람이 죽었다는 단순한 사실보다 모두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잊어가게 만드는 시간의 얄궂음 말이다. 나는 보잘것없는 글로나마 그들이 땅 위에 발 붙이고 잠시나마 살았음을 기억하려 홀로 고군분투한다.


자살의 형태 중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혼자 사는 사람의 자살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대부분 유서를 남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가는 마당에 말 한마디도 남기고 싶지 않을 만큼 지긋지긋했을지도 모르겠다. 번개탄을 피워 사망한 남성의 유서 하나 없이 깔끔했던 방. 시체 옆에 있던 휴대폰엔 등록된 연락처가 하나도 없었다. 과학수사팀에서 현장을 감식한 뒤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 우리는 파출소에 돌아와 서류를 수습했다. 변사자를 발견했을 경우 작성해야 하는 서류가 꽤 많다. 한참 뒤 형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유가족과 연락이 닿았는데 시신 인수를 거부한다고 했다. 고인은 나랏돈으로 화장된 후 무연고라는 이름표를 잿더미 앞에 놓게 되겠지. 인생이란 이토록 허무하단 말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을까. 무연고자를 매장한 공동묘지에 간 적이 있다. 하늘길을 스치는 구름조차 숨 죽인 채 쓸쓸했던, 길고양이 한 마리 지나가지 않던 곳. 모두들 빈 주먹으로 힘차게 울면서 태어나는 건 똑같은데 죽음은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생을 마감한 인간은 결말이 난 영화처럼 이러쿵저러쿵 평가받기 쉽다. 그러나 나는 이 죽음들 앞에서는 그러지 않으려 한다. 조용히 묵념을 올리려 한다. 살아생전 얼마나 인간 구실을 못했으면 가족들이 시신 인수까지 거부하겠느냐는 말은 입 속의 검은 잎과 함께 애써 삼키려 한다.


유서도 없고 가족도 시신 거부하는 죽음


이런 죽음을 자주 볼 수밖에 없는 경찰관은 심리적으로 힘든 직업이다. 과학수사팀에 일하는 어느 선배는 길에 흩어진 장기와 뇌를 맨손으로 주울 수 있으면 과수팀에 지원해도 된다며 웃었고, 형사팀에서 일하는 동기는 비 오는 창밖을 보며 오늘은 추락사가 많겠다고 중얼거렸다. 현장이 주는 음산한 분위기에 동요되는 것보다는 이렇게 무미건조한 말이 정신건강엔 도움이 되겠지만, 어쩐지 쓸쓸한 마음은 떨쳐낼 수 없다. 이런 고충을 익히 알고 있는 선배들은 경찰관으로 오래 일하려면 건강한 취미생활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미국 드라마 <CSI: 라스베이거스>의 주인공 길 그리섬도 피해자에게 감정이입해 힘들어하는 후배에게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라고 위로를 건넨다. 그리섬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혼자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그러나 그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내내 소리를 지르거나 홀가분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울렁거리는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한다. 결국 경찰관이 직업인 이상 어떤 활동을 해도 감정의 일부분은 매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꽉 묶어도 속절없이 풀려버리는 신발끈 앞에 무릎 꿇게 되는 순간이 있다. 얼른 달려서 앞 주자를 따라잡아야 하는데 신발끈 때문에 주저앉아야만 하는 때가 있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된다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장난은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주저앉아 신발끈을 묶는 그 순간만큼은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큰 걸음을 내딛기 위해 신발끈을 묶으며 숨 고르고 있는 사람에게 얼른 뛰지 않고 뭐하느냐고 채찍질하는 사회가 되지 않길 바란다. 신발끈을 묶지도 못하고 달리다 넘어진 사람을 광대를 보는 표정으로 비웃지 말고, 손 내밀어 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오늘도 변사자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하며 홀로 소망한다. 내가 보는 마지막 자살자이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순찰차 운전대를 꽉 붙잡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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