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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os Jul 01. 2023

킬러문항을 킬러하는 방법

이거 킬러문항 아닙니까?

"선생님 기말고사 치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특히 주관 부서인 교무부와 연구부 선생님들 애 많이 쓰셨습니다."


드디어 1학기 마지막 시험이 무사히(?) 끝났다. 선생님들은 기말고사를 치르기 위해 한 달 전부터 출제를 한다. 출제와 검토, 인쇄(요즘엔 보안문제로 선생님이 직접 인쇄하는 학교가 많다), 확인 점검까지 시험을 보려면 할 일이 많다. '고생했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그런데 '무사히 끝났다'라는 말이 무섭게 교무실 전화기의 벨이 신경질적으로 울린다. 학교에서는 교감과 교장에게 직접 전화하는 일은 드물다. 대부분 학교 대표 전화번호로 전화가 오고 통화를 원할 경우 바꿔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 책상 위의 전화기로 직접 오는 전화는 십중팔구 민원전화이다. 그래서 나는 벨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교장선생님! 시험에 수능 기출문제를 출제해도 되는 겁니까? 이거 킬러문항이잖아요? 문제를 이렇게 어렵게 출제하면 어떻게 합니까? 내 아이 잘못되면 학교가 책임질 겁니까?"


학부모는 기본적인 정보도 주지 않고 나에게 다짜고짜 쏘아붙였다.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무사히 시험이 끝난 후의 안도감'은 온 데 간 데 없고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 크게 들렸다.


"네 학부모님 잘 들었습니다. 몇 학년 무슨 과목인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야 제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잖아도 요즘 학교는 난데없는 킬러문항으로 뒤숭숭하다. 이런 시국(?)에 학부모 전화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학부모에게 학년과 과목을 알려주셔야 확인이 가능하다고 친절한(?) 목소리로 안내하였다. 그랬더니 학부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교장선생님이면 수능 기출문제를 출제한 과목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튼 응당한 조치를 취해주지 않으면 교육청에 민원을 넣겠습니다."

"뚜뚜뚜..."


이런 말을 남긴 채 학부모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교무실에 선생님들의 긴 한숨 소리가 통화종료음과 뒤섞여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학부모는 교장인 내게 세 가지 숙제를 내주었다. 과제 불이행 시 상급기관인 교육청에 민원을 내겠다는 협박과 함께.


첫 번째 숙제는 수능 기출문제를 출제한 과목과 학년 찾을 것

두 번째 숙제는 응당한 조치를 취할 것

그리고 마지막 숙제는 교장은 선생님들이 출제한 시험문제의 정보를 모두 파악할 것


사실은 숙제가 세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장은 학부모 민원이 오면 처신과 처리를 잘해야 한다. 처신은 민원을 대하는 말과 몸짓이고, 처리는 요구사항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다.

학부모의 민원제기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요구조건을 다 들어주면 선생님들의 기(氣, ?)가 꺾이게 된다. 그렇잖아도 요즘 학교 선생님들의 자존감은 거의 바닥이다.

반대로 선생님만 생각하여 학부모의 민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 또한 문제가 발생한다. 정당한 민원을 무시했다는 소리를 듣게 되고 상급기관인 교육청에 다시 민원을 제기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분명한 사실은 학교를 상대로 교육청에 민원 낸다는 말은 거의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 경우가 많다).


이럴 때 해결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바로


학생의 입장에서
학생을 중심에 두고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아이들의 바람직한 성장에
도움이 되는지를 헤아려 판단하면 된다.




다행히(?) 같은 교무실에 있는 선생님이 출제한 과목이었다. 전화가 끝나자마자 해당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알려주었다.


선생님께 어떤 상황인지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수능 기출문제는 맞다. 하지만 20년 전에 출제된 문제이고 똑같이 낸 것이 아니라 문제의 지문(제시문)만 그대로 썼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수업시간에 해당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알려줬고 해당지문이 시험문제가 나올 수 있지만 만약 나온다면 답지(①, ②, ③, ④, ⑤)의 내용만 바뀐다고도 알려줬다는 것이다.


'굳이 이 지문을 사용한 이유가 뭔지?'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은 교육과정에 있는 성취기준을 만족할 만한 좋은 지문이라고 판단되어 썼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선생님은 몹시도 슬퍼 보였다.


이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분이다. 생각과 행동이 요즘 아이들의 코드에 딱 맞고 수업을 열정적으로 잘 가르친다고 소문이 자자한 분이다.

하지만 사교육 시장 즉 학원가에서는 이 선생님 같은 스타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선생님의 수업 방식과 시험문제 출제 방식이 학원가에서는 예측하기 너무 어려워 수강생들에게 족집게(?) 문제 풀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해당 지문을 사용할 충분한 이유로 타당해 보입니다. 다만 선생님의 출제의도를 전혀 모르는 학교 밖에서는 드러난 현상만 보고 판단할 것이고, 요즘 같이 '킬러문항'으로 나라 전체가 떠들썩한 상황에서 우려의 소지도 있어 보입니다. 또한 학생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오래전 기출문제이고 수업 시간에 이미 알려줬다 하더라도 선생님의 의도와는 달리 수능 시험을 의식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또한 학생들이 벌써부터 수능 시험을 의식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 같습니다. 열정적으로 가르치면서 우리가 이런 비난을 받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는 분이라는 걸 잘 알기에 조심스럽게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말에 대답은 안 했지만 그 침묵의 의미가 무엇인지 동료로서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의 수업이나 평가에 대한 학부모 민원은 잘 대처해야만 한다.

자칫 선생님들의 열정을 꺾을 수 있고 자존심에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사의 전문성은 교실에서의 수업과 평가로 인정받고 이것은 교사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네 안녕하세요? 학부모님. 제가 알아보니까. 기출문제를 사용한 것은 맞습니다. 다만 20년이 넘은 기출문제를 사용했고 이미 수업시간에 내용을 다 알려줬으며, 무엇보다 교육과정에 제시된 해당영역의 성취기준을 잘 보여주는 제시문이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학생의 입장에서 좀 더 신중하게 시험문제를 출제하라고 당부했으며 저도 잘 살펴보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학부모의 전화도 교육청의 전화도 없었다.


참고로 학부모가 제기한 킬러문항(?)의 정답률은 70%, 100명의 학생 중 70명이 정답을 맞혔다.



부연하여,


언론에서 소위 '킬러문항'의 문제점에 대해 대서특필하고 있습니다.

교사 시절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관한 시험문제 출제위원과 검토위원을 실제 경험한 저로서는

'교육과정(교과서)을 벗어난' 킬러문항은 없어져야 한다는 입장에 동의합니다.


최상위권 학생들의 변별력을 위해 한 두 문제를 어렵게 출제하는 것은 평가원 출제를 경험한 저로서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출제자들도 속병이 날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생경한 킬러문항을 접하는 학생과 선생님도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최상위권 학생들은 한 두 문제의 킬러문항을 맞추느냐 못 맞추느냐로 인생이 결정됩니다.

중하위권 학생들에게 킬러문항은 딴 나라 이야기입니다.


교사 또한 말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4년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해당 과목에 대한 석사(또는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내가 이 문제를 맞히지 못 한다는 부끄러움은 어디 가서 말도 못 하는 큰 상실감을 주기도 합니다.


교육문제를 해결한다고 내놓은 그들의 말들과 정책 속에 과연 우리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진정 학교교육의 본질을 위하는 길인지?

의도와는 달리 잘못된 시그널을 주고 있지 않은지?

추진하고 반대하는 목소리 이면에 또 다른 속셈이 들어있지 않은지?


그들의 임기는 정해져 있지만 학교 학생들의 임기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아이들에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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