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니퍼 Oct 15. 2023

미련 가득한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코로나에 걸렸다

외롭고 순진한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죽음은 허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중소도시에 살고 계신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약 2년 동안 홀로 지내셨다. 86세 노인임에도 새벽에 운동을 하고, 옥상에 빼곡하게 텃밭을 가꾸며 고추 모종을 200 여 포기나 심어두기도 했다. 그 나이에도 운전대를 놓지 못해 자동차를 바꾸고 싶으셨는지 통장에 꽤나 큰돈을 모아두신 걸 돌아가신 후 알게 되었다.


사고가 난 날 119 구조대원의 전화를 받았다. 자전거를 타고 약국에 다녀오시다가 자동차에 부딪혀 응급실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4남매 중에 둘째 딸인데 아버지와는 가족 중에 제일 가까운 사이가 돼 있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아버지는 다른 자녀들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픈 어머니를 두고 환갑 넘은 나이에 늦바람이 난걸 당시 같이 살던 자녀들에게 들켜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외도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30대 초반이었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학진학을 위해 스무 살에 집을 떠나왔기에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던 다른 남매들과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조금 달랐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바람난 아버지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하필 그걸 다 큰 자식들한테 들켜버린 게 애처롭게 여겨지기도 했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전업주부인 아내와 딸 셋에 아들 하나인 4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마칠 수 있도록 외벌이로 성실하게 가족을 부양해 온 분이셨다. 환갑을 넘긴 늦바람만 아니라면 말이다.


어머니는 당뇨병과 파킨슨 진단까지 투병 기긴이 길었음에도 가족에 헌신적이고 자녀들과의 유대감도 좋은 분이셔서 온 가족이 애틋하게 보살폈다. 가까이 살던 여동생은 거의 매일 엄마가 계신 병원으로 출퇴근하듯 다녔고, 막내아들인 남동생은 엄마가 계신 지역으로 발령을 신청해서 요양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만 4년 가까이 한 지붕 아래서 보살폈다. 서울 살던 언니도 어머니를 자기 집으로 모셔가서 한 달 이상을 함께 지내며 살뜰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는 바쁘게 산다는 이유로 겨우 한 달에 한번 정도 엄마를 만나러 가곤 했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생활한 3년 가까운 시간에 아버지 역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원 문턱이 닳도록 엄마를 만나러 다녔다. 엄마가 좋아하는 간식을 싸가기도 하고 일이 있을 때는 새벽에 일찍 들러 눈도장 찍는 걸 거르는 법이 없었다. 2019년 말부터 코로나로 그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고, 요양병원 면회금지 등 사유로 6개월 이상 가족들과 단절의 시간을 보내던 어머니는 이듬해 여름 먼 길을 가셨다. 


먼저 돌아가셨으면..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먼저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홀로 남겨지면 그 삶이 몹시 외로울 테니 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 신 후부터 아버지는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돼버리니 그래도 조금 친한 내가 아버지와 소통을 주로 하게 된 것이다.


병원에 도착한 아버지는 고관절 골절이 확인돼서 수술을 해야 했고 내가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담당의사가 고관절 접합 수술은 크게 3가지 위험이 있지만 본인이 집도한 수술 100건 중에 2~3건을 제외하고 안정적으로 회복했다며 자신의 전문성을 어필했다. 그런데 86세 노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수술이었나 보다.


수술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졌고 수술 후 입원기간 동안에도 비급여 항목의 이러저러한 처치에 대한 동의서 서명을 수 차례 요청받았다. 어느 하나도 거절하지 않았고 무엇이든 제일 좋은 약과 치료를 부탁했다. 입원 중에도 아버지는 약속이 있어 어딜 가야 한다며 침대 밖으로 내려오시려는 통에 결국 사지를 결박당하기도 했다. 남동생과 교대로 아버지를 성심껏 살펴드렸지만.. 폐까지 퍼진 염증을 이기지 못하고 수술 후 고작 2주 만에 먼 길을 가셨다.


병원비가 1천만 원 가까이 나왔는데 아버지가 새 차를 사고 싶어 통장에 모아 두셨던 돈이 병원비를 정산하고도 남는 금액이라 자녀들의 지갑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신 바로 그날, 나는 코로나에 확진돼서 장례식에 갈 수 없는 처지가 돼 버렸다. 사실 시기의 나는 심리적으로 번아웃에 가까운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정말 멈추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끌려가듯 일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회사와 합의했던 근로시간 조정에 대한 약속이 이행되지 않아 개인적으로 결단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리고 찾아온 '멈춤'

아버지의 부고는 나에게 누구도 무언가를 요구할 수 없는 멈춤의 시간을 선물했다. 

아주 오롯하게 게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말이다. 마치 친하게 지내준 딸에게 먼 길 떠나며 나를 돌아볼 시간을 선물한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가 선물해 준 멈춤의 시간 동안 나를 돌아보는 깊이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걸 바꾸기로 결심했다. 광고에서 본 글인데 심플한 '운명 개척론'에 공감이 돼서 메모해 두었는데 내 삶에 적용할 때가 되었음을 확신했다.

지난 4년 동안 반복되던 일과 삶의 방식을 180 바꾸기 위에 '은밀하고 위대한 결심'을 했다.




운명을 개척하는 방법은 의외로 심플하다.

잘되는 건 지키고 안 되는 건 바꾸면 된다.

악연을 만났다면 인연을 끊고,

터가 안 좋았다면 이사를 가고,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이직을 하고,

외모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다면 외모도 바꾸는 것이 좋다.

이때 한 번에 모든 걸 바꾸는 게 좋다.

어디에 요인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환경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삶은 180도 변하게 되어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