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갱년기가 되면 감정이 예민해지고 우울감에 빠진다는 얘길 들었지만, 바쁜 일상 탓인지 체감이 낮았다. 그런데 지난 여름부터 몸에 열감이 간헐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일상을 돌아보니 감정적으로도 매우 예민한 시기라는 걸 발견하게되었다. 갱년기는 다른 말로 폐경 이행기 및 폐경이다.노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데 4년에서 7년까지도 증상이 발현된다고 한다. 처음엔 인정하기 어려웠다.
갱년기와 사춘기가 만나 폭풍의 언덕
수십 년간 매달 어김없이 찾아오던 생리가 지난해 여름부터드문드문해졌으니 나도 폐경 이행기로접어든 것이다.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니까 당연한 현상인데 신체적, 심리적 변화에 그저 둔감했을 뿐이다.갱년기로 예민한 엄마와 사춘기로 뾰족해진 딸의 일상에 고양이 솜이가 없었다면 아마 큰 사달이 몇 번은 났을 판이다. 더구나 갱년기의 평균 기간이 4~7년이라니.. 지난해 중학교에 입학한 딸과 함께 모녀가 '폭풍의 언덕'에 살림살이를 펼친 형국이다.단둘이 산다면 전쟁 같은 날들을 피할 수 없을 텐데.. 우리 집엔 다행히 솜이라는 반려묘가 두터운 안전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기상청에는 없는 날씨의 연속
솜이가 우리 곁에 온 지 벌써 3년 4개월이지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름도 참 잘 지었다. 딸과 나 사이에서 폭신한 솜처럼 완충제 역할을 하고 때로 갱년기 엄마의 말벗이 돼주고있으니까.. 딸과의 일상은 어떤 날은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다가도 어떤 날은 쌩하고 찬바람부는상황이 반복되고 있다.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변화무쌍한 날이 지속된 시기도 있었다.지난해 여름부터 가을 사이엔 총성 없는 전쟁 같은 날들을 보냈었다. 그래도 요즘엔 요리에 재미를 들여 방 밖으로 자주 나오니 다행이다.
말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팔 때
상처받지 않으려고 다짐을 해도 툭 뱉는 말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팔 때가 종종 있었다. 저녁 밥상 차려주고 말 한마디 건네었다가.. 단호하게 "안 궁금해"라고 딱 잘라 말했을 때 충격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단어가 포함된 문장이었다. 사정은 이랬다. 연초 2주간 휴가 중에 첫 주에는 딸과 함께하는 여행과 체험일정을 잡아두고 둘째 주에 나를 위한 2박 3일을 준비했다. 여고동창 친구랑 제주도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출장이나 일이 있을 때마다 언니가 우리 집으로 와 주었는데 이번엔 언니 일정이 조금 어렵다고 했다. 언니가 시간이 안되면 두 번째로 부탁할 곳은 여동생 집이다. 그런데 문제는 딸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점이다. 전주 동생집에 부탁했더니 방학이니까 일주일 정도 보내라고 했다. 친구와 약속은 했고 딸에게 전주 이모집에 가 있기를 설득해보려고 했다. "엄마도 휴식이 필요해. 큰 이모가 시간이 어렵다고 하니 전주에 다녀오면 안 될까?" "싫어"라는 답을 하는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한번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 주 전주에.."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예쁜 입에서 나온 말이 "작작 좀 해"였다.화를 내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런 말을 어디서 배운 거야?"라고 물어보니 대꾸도 없이 휙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며칠 전엔 소아과에 같이 다녀오는 길이었다. 무슨 말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또 삐딱 신이 내리셨다. 같이 손잡고 걷던 길가에서 손을 뿌리치더니 갑자기 다람쥐처럼 쌩하고 앞지르기를 하면서 달려가 버리기도 했다.
화를 내지 않을 결심
지난 명절에는 코로나로 가족이 모일 수 없자 이전과 마찬가지로 줌에 접속해서 명절맞이인사를 하기로 했다.제주도와 전주, 서울, 동탄에서 줌으로 접속해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는데 우리 딸은 자기 얘긴 하지 말라며 방으로 쏙 하고 들어가 버렸다. 매사 이런 반항과 변덕의 상태가 사춘기라니..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했다. 아이에게 화를 내는 것이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늘 참다 보니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또 작심해야 했다. 화를 내지 말아아야지.. 화를 내지 말아야지..
지난가을부터 아이와 관계 개선을 위해 내가 노력한 일은 아침밥을 꼭 챙겨주는 일이었다. 배고플 때만 엄마의 필요를 느끼는 딸에게 밥을 먹는 시간만큼 최선을 다 하고 있다. 아주 당연한 일이지만, 원거리 출퇴근에 아침밥을 차려주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피곤해도 졸음을 떨치고 벌떡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한다.
이런 노력의 보답일까? 최근 딸아이의 놀라운 변화는 씻는 일에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점이다. 한동안은 정말 양치와 머리 감는 일을 자꾸 미루는 통에 치약을 짜서 손에 쥐어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씻는 걸로 투닥거릴 일이 없어졌다.
반려동물이 가족의 평화에 미치는 영향
갱년기 엄마와 사춘기 딸의 아슬아슬하고버거운 일상에 조력자인 우리 집 고양이를 칭찬해 보려 한다. 지금도 내 곁에서 애교를 부리며 바라본다. 사실은 딸을고양이와 함께키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상에서 난감한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내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워 깊은 한 숨이 나올 때마다 위로가 돼주는 우리 솜이는 복덩어리다.성격이 좋고 무한 친화력을 지닌 조금 특별한 고양이다.
사춘기 딸이 확 토라져서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리면 나도 기가 빠져 내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눕는다. 어느새 솜이는내 침대로 따라와서하고 싶은 말은 다 해보라는 표정을 짓는다.
"무슨 일이야? 내가 다 들어줄게!"
오늘은 반려동물이 가족의 평화에 미치는 영향을설명하느라 이 긴 글을 쓴다.앞으로 길면 7년까지 사춘기 딸과 갱년기 엄마의 일상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데.. 솜이를 가족으로 맞이한 일이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딸과 대화에서 말문이 막힐 때도,딸을 혼자 두고 출근을 할 때도 든든한 조력자가 돼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