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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아 Nov 19. 2023

숨길 수 없어요, 시에 드러나는 진심

중2 남학생의 의외의 시

수행평가 채점, 280명이 좀 안 되는 아이들이 쓴 시를 읽었다. 아니, 줄거리를 포함한 감상문과 시와 재구성 의도와 소감까지 두 장 짜리 활동지를 채점했다. 글씨 크기도 글씨체도 다 다른 아이들의 글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힘든 와중에도 글을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특히 시의 경우, 쓸 때 엄청 어려워하더니 다들 시를 완성해냈다. 등장인물의 애틋한 마음이 드러난 시, 뒷부분을 상상해 쓴 시, 화자를 바꾼 시 등 다들 재구성해서 시를 쓰느라고 고생이 많았다.

수행평가 점수를 확인해 주었다. 일부러 학습지 풀 시간으로 진도를 맞추어, 개별적으로 피드백했다. 줄거리에서 인물에 대한 설명이 아쉬웠어, 주제가 너무 일반화되어서 점수를 다 못 줬어, 시는 잘 썼는데 그렇게 바꾼 의도 설명이 없어, 이렇게 아쉬운 소리도 했지만 칭찬도 했다. 줄거리만 읽어도 내용이 상상 돼, 인상적인 장면 설명이 좋아서 소설이 궁금해졌어, 주제에 대한 이 표현이 정말 마음에 들어, 소감에 활동의 의미에 대해 잘써줘서 선생님이 다 뿌듯했어. 점수에 대해서는 아주 예민하지만, 글에 대한 칭찬에 대해서는 다들 조금씩은 겸손해 하는 것 같다. 특히 시는 더욱 그렇다. 시를 정말 잘 썼어, 여기 이 부분이 참 좋더라, 이렇게 말하면 부끄러워하면서 ‘아니에요~.’ 하거나. 뭐라 대답도 못하고 웃기만 한다. 전교에서 딱 두 명이 '저 정말 잘 썼죠?' 하는 반응을 보였다.

각반에서 멋진 작품 몇 편을 추렸다. 학년 전체가 공유해 돌려 읽으면 친구들에게 책 소개도 할 수 있고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 그런데 훌륭한 작품들과 별개로 내 뇌리에 박힌 시는 엉뚱한 것이었다. 우리 반 남학생 고수의 시! 아이가 선택한 소설은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내가 우리 반에 마련해 둔 학급문고에 있는 책이다. 소설을 읽었다기보다는 영화를 알아서 골랐을 것으로 확신한다. (줄거리나 감상문에서 부실함은 금세 드러나고 만다.) 원작을 시로 재구성하는 것은 원작의 가치를 기반으로 해야 하는데, 아이는 전혀 엉뚱한 시를 썼다. 그걸 보고 웃고 말았는데 제목이 ‘스즈메의 입단속’이었기 때문이다. 시는

‘교실에 있는 친구들

시끌벅적하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스즈메 스즈메 애들 좀 조용히 시켜라’

로 시작한다. 중간에도 운율감이 살린 비슷한 내용이 있고 마지막 두 행은 이렇다.

‘스즈메가 말한다

너희들이 하는 말 다소중해'

띄어쓰기도 되어 있지 않은 저 마지막행을 읽고 나는 찡했다.

우리 고수로 말하자면 축구를 좋아하고 주말이면 온종일 밖에 나가 논다고 한다. 언젠가는 자전거를 다섯 시간이나 탔다는, 아주 튼튼하고 이것저것 재는 것 없이 몸이 먼저 행동하는 남학생이라고 해야 할까. 딱 중2 남학생. 한 번은 호르몬의 변덕으로 무언가를 부수기도 했지만, 그 후로는 별일이 없었다. 내가 말을 건넬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체할 만큼 과묵하고, 대답을 할 때면 단답형으로 하며, 요새 보여주는 눈빛은 순하기만 했던 고수. 시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자신이 드러나기 마련일까. 이 아이의 손끝에서 나온 시, 그 마지막줄이 ‘너희들이 하는 말 다 소중해’라니!  기침, 가난, 사랑은 숨길 수가 없다지 않나. 숨길 수 없는 다정함이 시에 드러난 거라고 밖에. 어쩔 수 없이 시의 저 구절을 외우고 말았다. 국어교사로서 점수를 많이 주지는 못했지만, 담임으로서는 아이가 정말 예뻐 보였다.

내가 만나는 학생들, 그들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작은 부분이다. 수업 시간에, 급식 줄을 서는 시간에, 청소 시간에나 그들의 행동과 말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것. 내가 보는 게 다가 아니란 걸 알고는 있지만, 이번에 읽은 의외의 진심으로 또 새로운 발견을 했다. 중2의 귀여움이라니, 이런 순간들 때문에 내가 중학생에 대한 애정을 끊을 수가 없다. 시에 나타난 마음이니까, 친구들을 소중히 여기는 이 마음이 진심일 거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그 기특한 진심들을 만나고 싶다.

@다다르다 1층에 마련된 문학동네 시인선

우리 반 수고가 많은 학생들을 위해 책 몇 권을 샀다. 일부러 가벼운 책을 골랐는데 소설의 첫만남, 독고독락 시리즈, 그리고 시집. 아이들을 불러모아 가위바위보로 가질 책을 고르게 했는데 시집은 끝까지 남았다. 이것도 중학생의 진심? 저렇게나 많고 고운 색깔의 진심들이 우리 앞에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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