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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아 Dec 03. 2023

삶에서 누리는 달콤함, 점심시간

점심시간의 기쁨으로 시작해, 결국은 책 만드는 기쁨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란 제목은 종종 내 안에서 살아나는 문장이다. 그러니까, 그 허무를 어떻게 하지? 조급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간 김영민 교수님의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그림책 <할머니의 팡도르>에 관련된 것이었다.


<할머니의 팡도르>는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은 삶에서 달콤함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 그 달콤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죽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에게 달콤함의 레시피를 남길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쩌면 이 세 가지가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위안의 거의 전부다.

                                                           - 김영민,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평론


맞아, 삶은 힘들고 허무하지만 달콤함을 누려야지. 인생이 좋다는 걸 내 삶으로서 다음 세대에게 보여줘야지. 살아갈 힘을 주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내 주변 중학생들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학교 생활의 기쁨 중의 하나는 점심시간일 터. 우리 중학생들은 매일 다른 식단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그 시간을 기다린다. 기다림의 자세는 저마다 다른데, 매월초 배부되는 급식 안내물을 고이 접어 필통에 넣어두고 오전에 확인하는 학생, 일자별로 오려내 한 권의 미니북을 만들고 넘겨가며 보는 학생, 물론 그날그날 외우는 학생도 있다. 반마다 칠판에 특색 있게 급식을 안내하기도 한다. 어떤 반에는 그저 그날의 메뉴가 정갈한 글씨로 쓰여 있고, 어떤 반은 한글과 그림이 함께 있어 흰색 분홍색 노란색 하늘색의 네 가지 분필로 급식이 먹음직스럽게 그려져 있다. 어떤 반엔 오늘의 식단과 내일의 식단이 나란히 쓰여, 이틀 치 기대감에 내가 다 벅차기도 했다. 녀석들, 고단한 삶의 기쁨을 발견하는 방법을 알고 있군. 4교시 수업이 끝날 무렵, “오늘의 메뉴는 뭐야?”라 물으면, 어느 반이든 AI처럼 바로 알려주는 학생들이 있다는 거. 그들은 식단을 외워 말하며 울상을 짓는 법이 없다. 그럴 때 나는 그들의 즐거움을 고스란히 전달받곤 하는데, 이것 봐, 아이들은 이미 <할머니의 팡도르> 속 지혜를 체득하고 있지 뭔가.

 

점심시간은 급식 메뉴에 대한 기쁨도 있지만 충분한 쉬는 시간이라는 의미도 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다른 반 친구들과 모여 웃고 말하며 우정을 키운다. 밥 먹을 때부터 야구 글러브나 공을 챙겨 운동장을 누비는 남학생들도 있다. 어떤 아이는 급식을 대충 먹고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자습하는 시간을 누리기도 한다. 교실 말고 다른 공간을 찾아가는 이들도 있다. 공부할 거리를 싸들고 도서관에 가서 자리 잡고 시간을 보내는 거다. 우리 보라도 그런 학생이었다. 점심시간이면 늘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보라에게 최근 이삼 주는 평소와 다른 시간이었다.


올해 맡게 된 독서동아리는 우리만의 책 만들기가 목표였다.(자기만의 책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두 명은 자기 책을 만들겠다고 해서 원고를 기다리는 중이다.) 독서토론동아리 ‘독토리’의 책은 이제 인쇄 직전으로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 독토리 아이들은 10월 말의 마감을 지켰고, 나로서는 마감일이 다가오는 게 두려웠다. 책 만들기를 또 어떻게 시작하나 하기도 전에 겁부터 났다. 그때 내 옆에서 좌청룡 우백호가 되어주던 존재가 바로 중2 독토리 연두와 보라다. 요즈음의 아이들이란 모두가 방과 후 일정이 빠듯하기 때문에 스케줄을 조정하다가 우린 점심시간마다 만났다.

동아리 부회장 연두는 내가 실체 없는 불안으로 엄두를 못 낼 때, 반짝이는 눈으로

“선생님, 제가 뭘 하면 좋을까요?”

묻거나

“그럼 이건 언제까지 해두면 좋을까요?”

하며 차근차근 차례를 밟아나가게 했다. 원고 양식에 ‘복사하여 붙여넣기’ 같은 일부터 배워가며 했지만,

“선생님, 이거 은근히 재밌어요. “

하면서 지루해하지 않고 미소 지으며 작업했다. 연두와 함께 작업한 첫날 나는 연두에게 고백했다.

“연두야, 네가 내 멘털 관리자 같아.”

나의 불안에 연두는 흔들림 없이 밝은 얼굴과 맑은 목소리로 힘을 북돋아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실의에 빠질 때마다 긍정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독토리는 단연 '긍정 연두'였다.

회장도 부회장도 아니지만, 연두와 같은 반이면서 에세이 두 편과 소설 두 편을 써낸 보라는 자기 글 피드백을 받다가 편집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글 프로그램을 곧잘 다루는 보라는 교정과 교열에 탁월했다.

글의 흐름을 잡고 목차를 짜고 순서대로 글을 붙이고 글꼴을 살피어(모두 내가 했다) 완성한 초고는 무려 200쪽이 넘었다. 학생들의 글마다 사진 하나와 작가 소개를 넣기로 해서(모두 내가 했다), 그걸 받아내고 독촉하고 하는 일에 지쳤지만 발 빠른 연두가, ‘제가 연락할게요’ , ‘제가 가서 말하고 올게요’ 하며 나서 주어서 11월 안에 완성할 수 있었다. 혼자 일하는 게 파일이 여러 개 생기는 것보다 혼선을 빚지 않고 좋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함께하면 힘을 받는다는 것을 간과했다. 나 혼자 했다면 이런저런 업무에 치여서 하다 말다 했을 편집을, 두 독토리 덕에 박차를 가해 진행해 나갔다.

거의 완성된 원고의 페이지를 확인해, 목차에 정확한 쪽수를 기입하던 날 보라가 말했다.

“선생님, 저는 원래 이 시간이면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했었거든요? 요즘에 이렇게 교무실에 와서 책 만드는 게, 선생님은 제가 자꾸 와서 귀찮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재밌어요. 이거 하면서 사는 게 재밌어졌어요.”

귀찮을 리가! 찾아와서 나를 채근하고 함께 작업하고 책을 만들어서 나 또한 얼마나 신이 났는데.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게 재밌다’는 고백까지 받다니!!!(글 편집하면서 느낌표 여러 개는 지우곤 했는데, 여긴 너무나 넣고 싶다.) 옆에 나란히 서서, 선생님도 같이 해서 좋았어. 이야,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고맙다. 주거니 받거니 행복을 나눴다.

원고팀의 작업이 마무리되면서 디자인팀을 수시로 불렀다. 표지는 어떻게 되어가니, 책 두께가 이제야 정해졌으니 작업하자, 책날개는 누가 작업하니 등등. 만든 것들을 받아서 내 자리 노트북에서 확인하고 같이 수정하는 시간이 있었다. 독토리 세 명이 와서 앞날개의 작가소개 부분을 이렇게 저렇게 고치고 있는데, 저 멀리 서계시던 부장님이 말씀하셨다.

“아니, 뭘 하길래 화면 보는 아이들 표정이 다들 저렇게 밝아요?”

“아, 저희 책 만들고 있어요.”

대답하면서 기뻤다. 작업하는 아이들 표정이 환했다니,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책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인 게 맞는구나. 힘들기만 한 작업은 아니구나. ‘우리’가 되어가고 있구나.


다시 <할머니의 팡도르>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도 저 이야기 속의 할머니가 되기를 바랐다. 다음 세대에게 삶의 기쁨을 전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먼저 기쁘게 살고 싶었고. 그런데 오히려 우리 독토리 아이들이 삶의 기쁨을 나에게 전해주고 있다는 걸, 책 만드는 과정에서 알았다. 정말 든든하고 벅찬 기분이다.


올해 마지막 동아리 시간, 점심시간마다 모여하던 작업의 마무리를 공유하고 <읽는 생활> 책의 글 두 꼭지를 함께 읽었다. 지금 여기 있는 아이들은 읽는 기쁨과 쓰는 삶을 아는 이들이므로. 작가의 일, 편집자의 일, 디자이너의 일을 해낸 아이들과 고단한 삶에서 우리만의 달콤함을 224쪽의 한 권으로 묶어냈다. 책 만들기를 큰 일거리로만 생각했는데 정말 커다란 기쁨과 활력을 주었다. 각각의 글이 엄청 뛰어난 작품은 아니어도, 모아둔 글들은 충분히 빛났다. 작업해 본 경험과 손에 쥐게 될 책 한 권이 아이들을 단단하게 걸음하고 힘차게 나아가게 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디자인팀 독토리의 선물, 직접 만든 달콤이

책이 나오면 우리는 또 점심시간에 도서관에서 모이기로 했다. 그날의 상기된 표정과 감탄의 소리가 벌써 느껴지는 듯하다. 이번 주 피크였던 내 두통과 충혈된 눈 하고는 이제 안녕이다,라고 쓰려고 보니 이제 시험문제 출제와 학교생활기록부 입력이라는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팡도르, ‘좌연두 우보라’하고만 안녕이구나. 그렇지만 두 독토리는 오래도록 기억날 학생임이 분명하다. 학생들로부터 배우는 삶, 달달하다니까.





@ 김영민,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평론

@ 임진아, <읽는 생활>,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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