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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영 nonie Dec 06. 2018

휴식의 공간을 한 번 더 정돈해주다, 턴다운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 - 여덟 번째 이야기

특급호텔 스테이에 익숙하지 않았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저녁 7~8시쯤 초인종 소리가 나면 무조건 손사래를 치면서 돌려보내곤 했다. 왜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또 룸서비스가 오는 거지? 의아해하면서 말이다. 호텔여행자로 전 세계를 다니는 지금은, 가끔은 DND(Do not disturb)를 잠시 꺼두고 외출하곤 한다. 저녁에 찾아오는 턴다운 서비스를 일부러 받아보기 위해서다.


편히 잠들 수 있게 침구를 정리해 주고 암막 커튼을 드리워주고, 객실을 정돈해주는 서비스를 턴다운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5성 이상의 특급 호텔에서는, 저녁의 턴다운 서비스가 기본으로 제공된다. 낮에는 그렇게도 채광이 환하게 비쳐들던 객실이, 턴다운을 거치고 나면 완연한 밤의 휴식모드로 완벽하게 변신한다. 할 일은 오직 하나, 씻고 잠자리에 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 이렇게도 여행이 편안할 수 있구나 하는 중얼거림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는 순간이, 바로 턴다운이 선사하는 힘이다. 




타이베이의 험블하우스 호텔 객실과 로비. 리셉션에는 디자인호텔스의 로고가 전시되어 있다. 


타이베이의 신이(Xinyi) 지구는 101타워를 위시해 수많은 백화점이 거미줄 엮듯 펼쳐져 있는, 타이베이 최대의 상업 지역인 동시에 럭셔리 체인 호텔의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의 한 복판에 위치한 험블하우스(Humble House) 호텔은 이 지역의 5성급 호텔 중에 유일한 독립 호텔이면서, 동시에 디자인호텔스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타이베이 호텔이다. 신이 지구의 바쁘고 분주한 분위기와는 달리,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나지막한 베이지색 톤으로 통일된 인테리어와 곳곳에 놓인 예술품이 들뜬 여행자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험블하우스의 턴다운 서비스는 작지만 섬세하다. 침구와 커튼 정돈은 물론이고, 저녁에는 침대 머리맡에 머그컵과 티백 하나를 예쁘게 세워서 놓아둔다. 객실에 비치된 차 종류와는 별도로, 밤에 마실 수 있도록 카페인이 없는 차를 따로 선별해서 놓아둔 그 작은 정성이 참으로 사려 깊게 느껴졌다. 겐마이차라는 일종의 현미 녹차인데, 우려서 한 입 마셔보니 담백하면서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역시 차의 나라 대만답다.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바라보는 101의 야경을 안주삼아 즐기는 한밤 중의 티타임은, 작지만 특별한 휴식시간이다.






싱가포르에서 최근 3년간 오픈한 호텔 중에 가장 큰 화제를 모은 호텔을 꼽자면, 역시 더 배가본드 클럽 싱가포르(The Vagabond Club Singapore)를 빼놓을 수 없다. 아트 갤러리 같은 로비와 객실, 전 세계 유명 예술가에게 제공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 독자적인 행보를 선보여 온 독립 호텔이다. 그래서 싱가포르의 호텔리어에게 배가본드에 대해 물으면, 모두 나보다 더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오픈한 지 반년도 안되어 트립 어드바이저 Top 5를 선점한 놀라운 인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서울 남대문에 문을 연 레스케이프 호텔의 디자이너, 쟈크 가르시아(Jacques Garcia)가 최초로 호텔 디자인에 참여한 호텔이기도 하다.





2016년 당시, 한국인 최초 게스트로 일찌감치 호텔을 찾았지만, 오프닝 기간답게 무척 어수선하고 여러 모로 부족한 서비스가 엿보였다. 예약 내역이 제대로 전달되어 있지 않아 체크인도 오래 걸렸고, 객실의 앤티크 스타일 전화기는 잘 작동하지 않아 직원을 불러야 했다. 예쁜 호텔이 언제나 좋은 호텔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실감하던 첫날이 저물어가던 저녁, 턴다운을 알리는 노크 소리에 문을 열자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나를 맞았다. 

객실이 깨끗해서 청소는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예쁜 사진엽서 세트와 시원한 물이 든 쟁반을 한 아름 안겨 주신다. 신선한 오이와 스타아니스를 동동 띄워 만든, 상큼한 맛의 인퓨즈 워터에는 그동안 여느 특급 호텔에서도 받아보지 못한 작은 정성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제너럴 매니저가 남긴 손글씨 엽서를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읽을 수 있었던 건, 아주머니의 이웃집 방문 같은 따뜻한 턴다운 서비스 덕분이다. 





그렇다면 체인 호텔 중에 기억에 남는 턴다운 서비스는 어디일까? 역시 위트와 재치가 엿보이는 콘래드 호텔을 빼놓을 수 없다. 비즈니스 출장자와 여행자가 두루 선호하는 콘래드 호텔은, 투숙객의 마음을 묵직하게 안정시켜주는 특유의 진중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있다. 물론 호텔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고급스럽고 조용한 나만의 공간'은 여행자의 휴식에 큰 도움이 되지만, 때로는 '특급 호텔은 지루하다'는 고정된 이미지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콘래드는 턴다운 서비스에서 아주 작은 차별화를 통해 그 틈새를 영리하게 파고든다. 이제는 콘래드의 상징이 된, 시그니처 인형 덕분이다. 


하루 종일 비행에 시달리던 어느 여행길에서, 저녁 8시가 넘어 콘래드 마카오에 겨우 도착했다. 이미 한참 전에 웃음기가 사라진 내 얼굴이 미소를 되찾은 순간은 고급스러운 호텔 객실이나 거창한 서비스 때문이 아니라, 베개 머리맡에 살포시 앉아 잇는 금빛 곰돌이 인형 때문이었다. 나보다 먼저 와서 침대에 자리를 잡고는, '안녕? 오느라 고생했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다음 날 턴다운 서비스 때 찾아온 직원은, 마침 객실에 있던 나에게 이 인형을 2개나 더 안겨 주었다. 


이후 여러 콘래드 호텔을 다니면서 태국에서는 코끼리를, 그리고 싱가포르에서는 전통 바틱 천으로 옷을 입은 곰돌이를 만났다. 다른 나라의 콘래드 호텔에서는 어떤 인형을 만날지 저절로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흔드는 서비스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온다는 것을, 나는 턴다운 서비스를 경험할 때마다 매번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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