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새벽 3시 40분이다.
어제는 책을 읽다가 잠들었다. 잠들기 전에 화이트 와인을 거의 한 병 정도 비웠다.
음.. 이렇게 적으며 시작하니 왠지 멋지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세일하던 싸구려 와인일 뿐이다. 맥주는 배부르니까. 다음날 일이있어 오전 6시에 회사에 도착을 해야 하는 일정이 있어 한 시간이라도 더 잘 수 있도록 근처 호텔을 예약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 다행히 집에 와야지 뭔 소리야 하거나 뭐 그런데 돈을 쓰냐라며 잔소리는 하는 않는 착한 남편이다.
나는 주말이라서 더 자야 되니까 등등의 갖가지 핑계를 자꾸만 스스로에게 들이밀며 와인과 김밥을 사서 호텔에 체크인했다. 이렇게 사치를 부려도 되나 하는 생각이 마음속 가득이었지만.. 저질렀다.
사실 어제도 출근을 했었다.(어제는 토요일이다.) 퇴근하기 전에 집으로 갈 것인가 호텔로 갈 것인가 고민을 하는 중에 잠시 급만남을 가졌다. 부탁받았던 전시 도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며칠 째 차에 실려있던 도록이었다. 야근을 핑계로 들르지 못해서.
늘 빈 손으로 나오는 법이 없는 그녀는 그 날도 내가 먹을 간식과 직접 그린 그림을 가지고 나를 만나러 나왔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저녁 햇빛이 눈물 나게 예뻐서 그대로 그녀를 태우고 멀리 떠나고 싶어졌지만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기에 보내줄 수밖에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녀를 보내고 차를 몰다보니 해가 뉘엿뉘엿지는데, 어쩐지 오늘은 내가 하고싶은 걸 마음껏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다가 눈이 떠진 시간은 2시 20분이었다.
틀어놓고 잠든 음악이 조금 커졌기 때문에 눈이 떠졌는데, 유난히 콧물이 줄줄 흘러 휴지를 찾아 콧구멍을 막느라 그랬는지 잠이 달아나버렸다. 이십여분쯤은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고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난 자야 된다. 내일도 다음 주도 할 일이 가득이다.
음악 선곡을 조용한 클래식으로 바꾸고 또 다른 방법으로는 잠들기 좋게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책이 너무 재밌어서 술술 읽히더니 잠이 오히려 멀리멀리 달아나버렸다. 망했다.
생각이 많은 새벽에 읽고 있던 책은 이런내용이었다.
책 속 저자는 행복을 찾는 법에 관해 이야기했다. 번아웃을 겪었고 그걸 이겨내는 과정에 대해.
그리고 그 방법을 책과 음악에서 찾게 된다고 했다. 뭐 대단한 방법도 아니다. 근데 왜.
문득 얼마 전 회사 서가에 책을 정리하는데 같이 정리하던 동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책임님은 책 읽으면서 위로를 받는 편이세요?
저는 절대 공감을 못하겠던데- 서점 가면 그런 책 엄청 많더라고요. 위로해주는 책들 있잖아요.'
그 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아마 저도 그렇지는 않아요.' 정도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취소해야겠다. 그 말. 나는 위로를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쩌면 내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버리는 순간 세계는 멈춘다.
쇼노 유지 ‘아무도 없는 곳을 찾고 있어’ 중
이건 지금 뿐일지도 모르는 마음이거나 혹은 새벽 감성에 젖어 든 생각일지도 모른다. 아마 내일도 여전히 방황하고 서성이는 마음일 테지만 그러나 분명히 도움을 받은 것 같다.
계속해서 적어도 이래야 하고 이렇게는 하면 안 된다는 내게 주어진 갖가지 역할에서 오는 중압감이 나를 짓누를 것이다. 그렇지만 내 삶에서 작은 기쁨이 주는 위안을 무시하지 말자. 세상에 무용하지만 즐거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잊지 말자 다짐한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 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긴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올리브 키터리지’ 작은 기쁨 중
그리고 헤르만 헤세도 말했다. 작은 기쁨에 대해서.
내 일상 속 작은 기쁨을 찾기로 한다.
작은 기쁨을 누리는 능력, 그 능력은 얼마간의 유쾌함, 사랑, 그리고 서정성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찬사를 받지도 못하며, 돈도 들지 않는다.
고개를 높이 들어라.
한 조각의 하늘, 초록빛 나뭇가지들로 덮인 정원의 담장, 멋진 개 한 마리, 떼를 지어가는 어린아이들, 아름다운 여성의 머리 모양.
그 모든 것들을 놓치지 말자.
(중략)
그러니까 어떤 꽃이나 어떤 과일의 냄새를 맡거나, 자기나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어린아이들의 대화를 귀담아듣는 특별히 황홀한 기쁨들 말이다. 벌들의 윙윙대는 소리나 어떤 멜로디의 휘파람 소리도 여기에 속하며, 그 밖의 수천의 자질구레한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 사소한 것들로 만든 작은 즐거움의 해맑은 고리로 인생을 엮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매일매일을 그런 작은 기쁨으로 살아가고, 더 큰 즐거움은 휴가나 좋은 시간에 즐기도록 아껴두라는 것이, 바로 내가 시간부족과 불만족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권고하고 싶은 말이다. 휴식과 매일 매일의 긴장이완과 해방감을 얻기 위해 큰 것이 아닌 작은 기쁨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헤르만 헤세
음악을 듣고 책을 읽다가 아무런 이유 없이 깨어나 다시 책을 읽는 이 행위가 이 순간이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했던 ‘작은 기쁨’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인정과 평가도 필요 없고 오로지 내가 원해서 하는 이런 활동. 나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
그게 필요했던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