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아주 맑고 따뜻한 날이었다.

by 도토리




내 커피는 내려놓은 지 한참이 지나 차갑게 식어버린 채 덩그러니 티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티타임을 제안받고 자리에 앉은 뒤 대화는 길게 이어졌지만 입구를 못 찾고 주변만 맴도는 듯한 대화는 계속 꼬리물기만 하고 있었다. 차를 마실 기분도 상황도 아니었다. 너는 손에 들고 있는 종이컵을 뱅글뱅글 돌리더니 어느새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본론 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은 함께 사업하자는 제안이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온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다고 하며 조금쯤은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인수된다면 너의 연봉은 정말 먼저 아주 높게 인상해주겠노라고. 자, 어떠냐고 그러니 계속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게 이야기의 본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제안 중에 당장 돈을 주겠다는 것은 아니다 보니라는 말을 넌지시 덧붙이며 우리의 미래는 이렇게 찬란할 예정이지만, 아름다워지기 전까지는 살짝 어두운 상태라 희생이 조금 필요하다고 한다. 연봉은 조금 줄여야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어쩌면 다른 직원들 몇몇은 내보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를 특별히 그 '장밋빛으로 빛이 날 예정'인 미래행 열차에 탑승시켜주겠다는 것이 그 제안이었다.


별 수 없이 듣고있었지만 내가 왜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예상했던 내용이지만 듣다 보니 숨이 막혀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속으로 속으로 삼키고 있어서였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묵은 공기가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는 느낌이라서 모자란 숨을 보충하려고 한숨을 내쉬어 보았지만 생각만큼 머리가 맑아지지 않았다. 설득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이야기는 점점 더 길어져만 가는데 핵심은 비껴나간 이야기일 뿐이었다. 내가 대답을 해야 끝나는 이야기.


Yes 혹은 No.


결국 현실을 옭아매는 건 돈이라는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처음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고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새 우리는 모두 성장해있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함께 했던 시간 동안 곧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 같을 거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지만 이런 관계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좀 더 다정한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였다.



너에게 화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잠을 설쳐가며 휴일을 반납해가며 그리고 개인 시간을 털어가며 에너지를 쏟았고, 새벽에도 쏟아지는 업무 메시지를 군말 없이 받았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누구에게든 따뜻하고 열정적인 사람이고 싶었다. 그럼에도 잘했다는 말 대신 원망의 말을 듣는 날도 허다했다. 내가 인내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를 위해서였다. 우리는 팀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우리 모두를 위해서. 자괴감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이제와 희생이라고? 아직도 나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는다고? 여태 함께 벌었던 그 많은 돈은 다 어디가고 왜 이런 상태인 거냐고 따져 물었어야 했던 그 순간에도 나는 네가 안쓰러웠다. 아무도 믿지 못해서 솔직해지지 못하고 꿋꿋이 버티고 있는 네가 짠했다.


그 날 나는 그냥 나사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주 정확하게 실감하고 말았다. 사업을 영위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요하는지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와 함께인지 모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서 어느 정도 당신의 힘듦을 이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버텨왔던 것이었다. 최저 임금만 줘도 되는 인력을 쓰려고 경력자를 내보내고 무경험의 신입을 뽑으려는 것이 남은 돈은 너의 품위 유지를 위해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란 걸 나는 모른 체하고 있었을 뿐이다. 만약 나에게 적당한 월급을 주었고 넌 그만큼을 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더욱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고 자신했던 것부터 내가 틀린 답을 들고 있다는거다.


우리는 가난하다는데 너는 부자가 되어가는 걸 보았다. 당신이 말하는 미래를 위한 감내라는 건 오롯이 팀원들의 것인가? 어쩌면 다투더라도 그때 따져 물었어야 우리가 적어도 건강한 관계로 헤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아주 나중이었다. 사람이 소모품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 정도 사이에서는 고통이란 건 함께 감수해야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슬펐고, 그저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꼭꼭 씹어 삼켰다.


아니. 안 되겠어요.


그 뒤에 아마 이야기를 덧붙였을 것이다.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꽤 떨리는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얼굴이 어색하게 뒤틀려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한 때 내가 아끼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으니까. 나는 전형적인 피플 플래져다. 나쁘게 말하면 호구 같다는 뜻이다. 그런 나의 입에서 나온 가장 단호한 No였을 것이다. 여유를 보이려는 듯 웃음기 띄고 있던 너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하얗게 식었다. 미팅룸 공기도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 날은 3월의 따뜻한 날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었다.

아주 따뜻했던 봄날의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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