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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Mar 04. 2021

아버지의 태세 전환

다 아버지 때문이야....




밥상에는 계란과 파가 단출하게 들어간 계란국과 봄동무침, 그리고 저녁에 구웠지만 이미 식어버린 조기구이가 올라있었다. 외출해있거나 잠들어있지 않다면, 식사 전인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밥상을 차려드려야 한다고 어릴 적부터 배운 K-장녀의 습관적인 상차림이었다. 이미 잠들어버린 엄마가 만들어 둔 봄동무침은 제법 맛깔나 보였지만 밤 11시에 먹는 밥은 아마 맛보다는 시장을 달래려는 목적이 더 강했을 것이다.




넌 연애 안 하냐? 남자 친구도 없고? 결혼 생각은 없냐?




밥상만 차려두고 방으로 들어가면 됐을 텐데,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아버지가 좀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마주 앉은 참이었다. 어떤지 돈을 버는 것의 고단함을 알아버렸달까..? 홀로 앉아 늦은 식사를 하는 아버지가 많이 작아진 것도 같았고. 아무튼 전혀 다정하지 않은 부녀가 어색하게 데면데면 밥상 앞에 앉아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던진 몇 가지 질문에 의미없는 대답을 하며 겨우 붙은 숨을 이어가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로부터 예상치 못하게 들어온 질문이었다.


그 날 나의 답변 이후였다. 밤 10시만 넘으면 집이 아닌 곳에 있던 나에게 쏟아지던 엄마의 '어디냐, 언제 오냐, 빨리 와라' 타령이 사라진 건. 물론 배후에는 아버지가 있었고.


꽤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둔 덕에 가장 아름다웠을 고등-대학교 시절을 밋밋하게 보냈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나란 인간은 청춘에 대한 로망이 꽤나 가득한 학생이었는데(지금도 좀..) 내가 읽던 책 속, 만화 속 청춘의 피크는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순정만화와 문학 소설을 즐겨 읽던 나는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생활에 대해 지나친 로망을 가졌었는데 (게다가 이은혜 작가의 점프 트리 A+를 읽어버렸다. 나는!)  긴 생머리 예쁜 교복을 갖춰 입은 여고생이라면 훈남 남학생과 애틋한 연애를 응당 해야 하는 것처럼 그것은 당연한 고교시절의 특권 같은 것이 아니었냐 말이다.


아무튼 고등학교 시절 남녀공학이란 응? 막 풋풋한 연애도 하고, 응? 공부는 원래 잘해야 되고 응? 학교에 훈남 남학생도 있어야 되고 막 그랬는데.... 일단 내가 긴 생머리가 아니었고, 호리호리 예쁜 교복이 아닌, 엄마의 빅픽쳐대로 3년 동안 옷 작아지지 말고 입으라고, 핏은 무시한 채 마치 아저씨 양복처럼 풍덩하게 맞춰준 교복을 입고서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선머슴 커트머리까지 하고 있는 나 자신을 거울로 본 순간 알았다.


아...나는 틀렸구나...


게다가 현실의 남녀공학이라는 것은 마치 초등학교 6학년의 반애들을 그대로 사이즈만 키워서 옮겨놓은 것 같았달까? 휴우... 1학년의 3월이 채 지나기 전에 여기서 애틋함을 찾는 것도 이미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미련이 남아서 그럼 밖에서 찾아보자 하며 연합 동아리 활동을 하던 선배 언니 손에 이끌려 동아리 미팅도   해보고, 졸업앨범  제법 예뻤던 친구사진을 보고 전화한 남고생들과 나름 미팅도 해보고 하며 만화  세상과는 많이 달랐던 고등학생 시절을 거치며, 그간 읽은 만화는  거짓이라는 것을, 그런 일들은 상위 1% 누군가 정도 누리는...... 아니 꿈꿀  있는 것이라는 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었다.

나름대로 꿈이 꽤 컸던 나는 성적과 적성, 우리 집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예술대에 진학하고 말았다. (그러게 진작 그냥 미술학원에 보내주라니까... )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미련한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당시엔 좋았다. 

교수님이 내어준 과제들을 학교에서 다 할 수가 없었는데, 그건 장비 때문이었다. 그렇다보니 선배들이 운영하는 개인 작업실을 학기당 이용료를 내고 사용했는데, 학교에 가거나 누군가와 약속이 있지 않은 대부분의 시간은 작업실에 처박혀서 작업을 하며 보내곤 했었다. 당시에도 밤 10시면 엄마의 '어디냐, 언제 오냐, 빨리 와라'가 시전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도 그 전화가 그렇게 하기 싫었는데 아버지가 눈을 흘기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고백했다. 과제도 해야 했었지만 사실 이유 없는 반항심에 집에 가기 싫었던 맘이 컸던 나는 밤을 새우며 과제를 하고 아침 첫 버스로 집에 들러 씻고 학교에 가곤 했었다. '과제'를 해가야  '학비낭비'를 하지 않는다는 대단한 핑곗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아버지의 걱정(?)과는 달리 우리 작업실은 실망스럽게도 굉장한 여초 상태였다. 심지어 단 한 명 있던 남자 동기는 과제를 밥먹듯이 안 해가며 학교도 잘 오지 않던 자유주의자여서 당연히 작업실에도 거의 오지 않았다.(그 자유로운 친구도 얼마 전 아빠가 되었다.) 뭐 거의 여자 기숙사 수준?


아무튼 나의 이팔청춘은 잔잔한 연애는 했다 해도, 대단히 애틋하고 아버지가 걱정하는 그런 어른의 그런 응? 19금스러운 연애 같은 건. 딸의 여성성을 대단히 높게 평가한 아버지의 걱정이 전혀 필요 없을 만큼 없었다는 게 팩트.


그래서 고분고분 말 잘 듣던 K-장녀는 귀염성 없이 내질렀다.



아빠 가아~!! 엄마 시켜서 맨날 전화하고!! 내가 지금 스물여섯인 데에~~

무슨 애도 아니고 응? 맨날 열 시 되면 집에 오라고 난린데~~~ 연애를 해야 시집도 갈 거 아니냐고~~~


그래서 만나는 남자도 없냐? 너 좋다는 사람도 없어?


없어! 없어! 7시에 퇴근해서 10시까지 집에 가야 되는데 무슨 연애를 언제 하냐고~ 대체~~



(....)




태어나서 세상 고분고분하고, 듬직해서 아들 같다는 소리를 듣던 K-장녀는 스물여섯 해에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불만을 말했던 것이다. 사실 전화 오는 건 괜찮았다. '응 곧 가. 지금 막 출발해.'라는 정해진 답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무슨 죄냔 말이다. 온다고 하고 오지 않는 딸내미와 가자미눈을 하고 흘겨보는 남편 사이에서. 그래서 놀면서도 마음이 엄청 불편한 것이었다.


그 이후 귀가시간 확인 전화는 확연이 줄었고.

다음 해인 스물일곱 해에 소개받은 남자 사람은 최초로 우리 집에 '남자 친구' 타이틀을 달고 놀러 왔었고, 아버지가 집에 있는 상태에서도 당당히 집콕 데이트란 것을 하더니 지금은 '남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10시 통금을 풀어준 덕에...?

(과연.. 덕인가... 하는 의문은 남앗...읍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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