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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연 Feb 12. 2023

내게 히피펌은 개성과 용기의 상징

한 달간 히피펌을 하고 다닌 적 있다. 이는 거의 내 헤어스타일 역사상 유일한 일탈 시기이기도 하다. 때는 끈적거림이 지루하던 사 년 전 한여름, 태생의 곱슬을 데리고 태어난 몇 가닥 없는 내 얇은 모발의 평범한 헤어스타일이라곤 덜 부스스해 보이는 볼륨매직과 단발 펌, 그리고 자갈치 스타일의 중단발 정도였다. 그렇기에 휴가를 한 주 앞둔 내게 휴가라는 바람과 더불어 진부한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주고 싶은… 일상 해방 욕구가 치솟아 있을 때였다. 인스타그램엔 히피펌 한 여자들 사진이 수시로 업데이트되었다.


나는 곧바로 미용사인 친구에게 연락해 고민 상담을 시작했다. 오늘 당장 히피펌 하고 싶어. 학창 시절부터 헤어 스타일링 해주기를 좋아했던 미용사 친구는 진심으로 조언했다. 안돼. 네 머리에 히피펌 하면 더 부스스해져. 너 후회할 거야. 그럼에도 친구와 한참 의견 (실제론 징징거림에 가까운) 조율을 한 나는 집을 나섰다. 미용실에 갔다. 볶았다. 친구의 손길에 감겨진 머리를 말리고 거울을 봤다. 과장 좀 보태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거기엔 처음 보는 모양새를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박박 우겨서 한 파마이기에 전문가인 친구 앞에서 충격을 그대로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할 수 있는 최대한 자연스러운(그러나 어색했을) 미소를 짓곤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다시 봤다.  긴 머리에서 똑단발로 잘랐을 때에도 그토록 낯설진 않았던 것 같다. 익숙해지겠지, 다가올 휴가와 다음날 출근이 걱정되었다.


다음날 아침, 머리를 감고 나와 물에 젖어 가라앉은 머리를 말렸다. 말릴수록 머리카락은 솜사탕처럼 보슬거렸다. 그런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어색했다. 헤어 에센스로라도 머리카락의 숨을 죽이고 싶어 듬뿍 발랐다. 그랬더니 머리가 기름져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머리를 묶고 출근했다. 바뀐 헤어스타일이 궁금하다는 동료들에겐 친구가 보내준 펌 직후의 뒷모습만 보여줄 수 있었다. 퇴근 후엔 히피펌 한 여자들의 사진을 정독했다. 한결같이 당당한 그녀들의 표정이 나를 기죽였다. 굵은 체인의 목걸이와 오렌지빛 볼 터치를 한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몰랐어? 히피펌은 나같이 ‘진짜’ 힙스러운 사람만 할 수 있는 거야.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문제는 진짜…. 옷차림에도 있었다. 세상이 정해놓은 규칙이 무조건적인 도덕적 규범이라고 믿었던 그때의 단정한 나의 출퇴근 복장은 굉장히 fm스러웠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단번에 내 직업을 맞출 수 있을 법한 매일이 k 직장인의 차림이었다. 슬랙스와 셔츠, 시폰 원피스, 트위드 재킷, 미들 굽의 샌들과 플랫슈즈, 가죽 가방이 옷장을 차지했다.(취향은 한결같나 보다. 옷장 사정은 지금도 비슷하다.)  ‘힙’스러운 박스티, 컬러풀한 상하의, 주렁주렁 주얼리 같은 아이템은 내가 선호하는 옷과는 거리가 멀었다. 맞지 않는 옷(헤어스타일)이라는 생각은 더욱 확고해져갔다. 히피펌을 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하긴, 지금이었다면 옷장에 무슨 옷이 있든 간에 히피펌을 별개로 개의치 않고 입고 싶은 대로 입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 정도 각오를 하고 파마를 했을 것이었기에) 사 년 전의 난 헤어스타일에 알맞은(?) 옷차림을 갖추는 게 예의라고 믿었고 사람들 사이에서의 독특한 나 자신을 용납하기엔 용기도 부족했던 것 같다.


머리를 묶고 다닌 일주일이 지나 떠난 강원도 강릉에선 머리를 푸르고 다니며 휴가인의 자세를 갖추어보기도 했다. 함께 떠난 미용사 친구는 왠지 울상인 날 위해 학창 시절로 돌아가 밤낮으로 머리를 만져주었다. 강원도에서의 삼일이 머리를 온전히 푸르고 다닌 유일한 날이다. 도저히 눈에 익을 수 없는 히피펌을 한 내 모습이 징그러워 정면 사진은 남아있지도 않다. 하지만 친구의 노고가 들어간 히피펌 한 내 뒷모습만큼은 지울 수 없는 한 때로 남아있다. 그 덕에 내 딴엔 특별했던 히피펌의 나를 소개할 때 잘 활용되고 있는 사진이다. 휴가를 다녀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볼륨매직을 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의 히피펌 한 염기정을 처음 봤을 때 들었던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호불호 없는 무난한 헤어스타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 아닌 (드라마적 연출이라지만)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개성 있는 헤어스타일로 직장까지 다니다니!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니는 직장이 보수적인 집단은 전혀 아니다.) 심지어 그런 당당함이 사랑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누구에겐 별것 아닌 것일지라도 내게 히피펌은 개성과 용기의 상징이라는 것. 아무래도 나는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히피펌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지 않았나 보다.


이후 내 헤어스타일은 평생을 그러했듯 재미없게 흘러갔다. 단발, 중 단발, 긴 머리 펌, 긴 생머리….. 평범하고 지루하고, 무난하게. 그래서 종종 개성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욕구가 나를 들쑤신다. 그럴 때마다 주변인들을 못살게 군다. (안 할 거지만) 히피펌 하고 싶어. 개성 있고 싶어. 내 머리 지루해.


뭐, 그다지 단정하게 살아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매번 독특하고 개성 있는 모습도 아니었던 내 인생. 이도 저도 아니어서인지 요즘은 자꾸만 파격적이고 싶다. 기껏해야 뱅 헤어 정도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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