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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연 Mar 12. 2023

혼자 떠난 제주 여행에서 배운 것, 여행의 이유

나는 여행으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이 좀 업데이트된 기분이 든다.

새해를 핑계로 벌려놓은 일이 몇 개 있었다. 그중 하나가 엊그제 다녀온 두 밤 짜리 제주 여행이었다. 일상 속 잦은 이벤트는 과다한 자극을 유발하기도 한다. 새해부터 시작된 분주한 움직임… 그로 인한 너무 잦은 마음의 자극이 좀 무서워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이번 여행은 그냥 취소할까 고민했는데 지난달, 완벽한 명분이 생겨버렸다. 1월 삿포로 여행에서 3년이나 쓴 자동 필름 카메라가 고장 났고, 그 핑계로 수동 카메라(미놀타 x-300)를 들인 일. 그저 수동은 맛(?)이 다르다는 카메라 고수들의 조금의 허세가 섞인 듯한 ‘이 세계에 온 걸 환영해’식의 추천 댓글을 열몇 개 정도 읽다 자연스레 구매하게 된 것. 그 세계의 자동, 수동의 개념도 잘 모르던 나는 당연히 조리개며 초점의 역할도 몰랐기에 ‘나도 멋진 수동 카메라를 쓰는 인간’이라는 뽕에 차 있었다. 여행은 자연스럽게 취소 없이 강행되었다.


김포공항에서 금요일 낮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서 일요일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좀 타이트한 일정엔 어디에서 뭘 하는 게 좋을까? 함덕, 탑동, 성산, 월정리…. 자주 가는 지역을 후보로 두고 고민했다 결국 고른 건 애월의 고내포구. 유명한 카페와 맛집이 즐비한 애월 카페거리와는 거리가 좀 있지만 고내포구엔 좋아하는 엘피바가 있고, 조용하고, 오래전 이용했던 잔잔한 바다가 보이던 깨끗한 숙소가 있었다.


출발 하루 전, 백팩 하나를 꺼내 여행에서 읽을 책을 골랐다. 얇은 백팩이기에 무겁게 여러 권을 넣을 순 없어 고민하다 겨우 고른 책은 미셸 슈나이더가 쓴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피아니스트인 그의 삶을 따라가며 그가 어디에서 영감을 얻고, 몰입의 영역은 어디까지이며, 어떤 식으로 삶을 살았는지 쓰인 전기였다. 여행에 피아니스트 전기라니, 예전의 나라면 투박하다 못해 정 없다고(?) 후회했을 거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깨달은 것은 여행길엔 밀도 높은 글이 더 잘 읽힌다는 사실. 오히려 내게 여행 중 읽는 가벼운 글은 집중도, 기억도 흐려지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이북 리더기는 필수로 챙기지만…)


탁월한 선택이었다!


근래 들어 짐 없는 여행에 집착과 자유를 누리는 중이었으므로 짐을 줄이기 위해 가장 고민인 건 여벌 옷이었다. 운동복 바지 하나. 두 밤 짜리 여행의 유일한 여벌 옷. 그 외에 카메라(가장 중요), 일기장, 노트북을 쑤셔 넣고 백팩을 잠갔다. 여행을 위한 준비는 끝난 셈이다.


오후 6시, 제주 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높이 떠 있는 해를 촬영하며 택시 기사님과 대화를 나눴다. 혼자 여행 온 여행자에 대한 기사님의 궁금증으로 시작된 대화에서 건진 건 마침 새별오름 들불축제 기간이라는 것. 처음 들어 봤다고 하니,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진행하지 않았다고 했다. 새별오름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계기라고도. 순간 책 한 권이 생각났다. 부부가 지역의 온갖 축제를 경험하고 소개하며 쓴 김혼비, 박태하 <전국축제자랑>이라는 웃겨 쓰러지는 책.(몇년 전에 읽었지만 지금도 웃긴 책 하면 이 책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책에 ‘들불축제’가 소개되었던가? 기억나진 않지만, 들불축제에 가면 내게도 재밌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택시는 고내포구에 도착해 있었다.


<솔트애월>


바다 쪽으로 조그만 창이 세 개나 있는 새하얀 방. 숙소가 지어진 지 얼마 안 되어 가오픈으로 운영할 당시 우연히 들르게 된 곳, ‘솔트 애월’ 사실 이 방에서 지금도 좋아하는 문장을 기록했었다. 방과 바다와 관리 잘 된 느낌은 그대로였다. 짐을 풀고 조금 쉬다가 여행 기분을 내고자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엘피바에서 간단하게 술과 음악을 즐길 계획이었다. 걸어가는 동안 일몰을 발견하면 찍으려고 카메라도 챙겼다.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손잡이에 붙어 있는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들어올 땐 미처 발견 못한 따듯한 말이 적혀있었다. 재방문 감사합니다. 디지털 시대에 재방문쯤은 누적 예약으로 금방 알 수 있었을 테지만 비대면으로 운영하는 숙소임에도 투숙객을 위하는 마음이 느껴져 감동했다. 섬세함은 또 한 번 이곳을 방문할 이유를 만들어준다지.



엘피바 ‘마틸다’로 가는 해안 길은 어두웠고 구름에 가려 일몰은 못 봤다. 그럼에도 정자 위, 바다 방향으로 덩그러니 놓인 귀여운 빨간 의자 하나를 찍었고, 더 어두운 까만 돌과 바다를 찍었다. 찰칵 거리는 소리가 듣는 쾌감을 주었다. 걷다 보니 금방 도착한 엘피바엔 손님이 몇 명 없었다. 몇만 개쯤 일지 모르는 많은 양의 엘피가 꽂혀있는 벽면 바로 앞자리에 앉아 칵테일을 시켰다. 음악 신청이 가능한 이곳은 몇 해 전 엄마 아빠를 데리고 왔던 그곳. 종이에 신청곡을 적어 낼 수 있어 손님도 선곡에 참여하게 되는 셈이다. 손님이 많아 괜히 긴장되던(내가 부르는 것도 아닌데…) 지난번과 달리 부담 없이 곡을 적어냈다. 그 음악은 구슬프고 아름다운 <연극이 끝난 후>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낯선 사람과 나누는 대화다. 자리에 앉은 지 삼십 분쯤 지나니 어느새 혼자 온 사람들이 바 테이블을 채웠다. 나는 테이블에 카메라를 올려두고 있었고, 왼쪽에 앉은 이는 책을 읽었다. 어떤 책일지 무척 궁금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남이 읽는 책이 무슨 책일지 너무 궁금한 마음 말이다. 책 읽는 이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기에 나대로 그 공간을 즐기고 있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종류를 바꿔가며 두세 잔쯤 마시다 보니 사장님이 카메라에 대해 먼저 질문을 했고, 책 읽던 이까지 카메라 대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내가 가진 카메라와 거의 유사한 카메라를 쓰고 있었고 사용 경력이 무려 7년이나 된다는 것이다. 그는 카메라를 보여주겠다며 적극적으로 차에서 꺼내오기까지 했다. 이 호의에 제대로 된 리액션을 해야겠다는 다짐과 동시에 그저 멋으로 가져온 카메라의 기능을 제대로 익힐 수 있는 절묘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역시 그는 내 질문에 진지하게 응해주었다. 나는 그 카메라 고수에게 조리개와 초점, 단렌즈의 특징까지 배웠다. 그의 카메라 중 하나인 미놀타 x-700의 렌즈를 빼서 내 카메라에 끼워 보기도 하며 강의를 수강하듯 경청했다.


그가 읽고 있던 책은 <아내가 결혼했다>의 작가 박현욱의 다른 글, <새는>이라는 장편소설. 아까부터 읽는 책이 궁금해 죽을 것 같았다는 내 말에 그는 내 카메라가 궁금했다는 말로 분위기를 열띠었다. 대화의 이어짐이 길어질수록 음악으로 향한 귀는 닫히고, 왼쪽에 앉은 낯선 이가 뱉는 말에 집중되었다. 칵테일 종류 하나하나 신중하게 고르던 나는 나중엔 고르는 게 중요해지지 않자 블랙러시안만 연거푸 시켜댔다. 어느새 우리는 친구가 되어 함께 새별 오름 들불축제를 가자는 약속을 했다. 그러다 자정쯤 가게를 나와 씩씩하게 걸어온 기억이 마지막, 눈뜨니 새하얀 방이었다.



오후 7시부터 자정까지 마셔댄 탓에 상쾌한 아침을 기대하는 건 양심에 어긋나지만, 여행까지 와서 숙취에 허덕이는 꼴이라니 잠깐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조식을 예약해 둔 탓에 9시에 억지로 로비로 내려갔다. 예쁘게 차려진 감자수프와 호밀빵, 아이스커피를 마시니 컨디션이 회복되는 듯했다. 밖으로 나가 조금 걷다가 오전 내내 휴식했다. 오후가 되어 겨우 밖으로 나와 사진을 찍었다. 어제 배운 대로 조리개를 최대한 열고 초점을 맞추는 척…. 하며 ‘찰칵’ 소리에 기대 고내포구의 이것저것을. 며칠 전까진 추웠다던데 봄과 여름 사이를 오가는 제주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헥헥 거리며, 단벌인 나 자신을 원망하기도 하며, 걷다 마주친 커피숍에 들어가 일기도 쓰고, 가져온 책도 읽으며 나 자신과 약속한 시간을 조용히 만끽했다.



제주에 여행 온 경험만 열댓 번은 되는 것 같은데 그동안 ‘축제’한번 가볼 생각을 못 했다. 그렇기에 제주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새로 사귄 친구와의 동행만큼 신선했다. 쭈뼛함 한 스푼 안고 다시 만난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이십 분쯤 달렸다. 주차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길게 늘어진 줄을 견디며 카메라 기능도 복습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갔다. 몇십 개의 몽골텐트, 주차를 안내하는 행사장 일꾼들, 꽤 컸던 무대, 6시까지만 참여하기를 강조하던 게임 진행자, 풍물놀이단 등 그야말로 잔치였다. 온 부스마다 어르신들이 앉아계셨고, 큰 현수막엔 잔치국수와 고기 국수 같은 식사 종류가 적혀있었다. 친구가 아낀다던 작은 카메라를 구경하고, 또 탐내며 손에 쥐어도 보고 찍어도 보았다. 내 카메라는 왜 반자동이라 불리는 지도 실감했다. 새별 오름을 오르다 경사에 겁먹고 중도 포기하기도, 한라봉 주스를 한 잔씩 사 마시기도, 관객보다 많은 것 같은 풍물놀이단을 보고 폭소하기도, 개당 천 원짜리 붕어빵을 먹으며 당당한 사장님을 곱씹으며 실실거리기도 했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 우연히 같은 취미가 있고, 우연히 같은 축제에 관심이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우연의 연속이라 기뻤고, 온도가 비슷해 불편함 없이 즐겁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엘피바에 혼자 술 마시러 오는 것 자체부터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던 것 같긴 하다. 게다가 경청이 습관인 듯한 그의 정직한 태도도 동행에 편안함을 더해준 것이라 믿고 있다. 아무튼 그 길로 숙소 근처 식당에서 나란히 저녁을 먹었고 친구가 청한 정중한 악수에 진심을 다해 잡고, 고마움을 전하며 여행을 마무리했다. 행운이 따른 여행이었다.



행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공항 가는 택시에서 기사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백팩 하나만 들고 탄 내게, 캐리어 같은 건 없으세요? 아우~ 단순하게 오셨구나! 하고 왠지 좋아하시던 목소리. 늘 짐만 많던 여행이었기에 그것은 단연코 기쁨의 칭찬. 계획대로 흘러간 것 없는 여행, 가져온 단출한 짐, 짐대신 마음이 풍성해졌던 짧은 여행. 공항까지 가는 20분간 얼굴도, 성함도 기억 안 날 낯선 기사님과 끝없는 대화를 나누던 시간도 남김없이 좋았다고 하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행복하기만 했던 주말여행을 좀 납득하려나. 나는 이번 여행으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이 좀 업데이트된 기분이 든다. 이것이 또 다른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만드는 원천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여행뿐일까.


제주에서 소진한 필름 두 롤은 조만간 피아노 학원 가는 길에 스캔을 맡길 예정이다. 자동카메라 다루듯 찍어대는 내게 초점을 너무 안 맞추는 것 아니냐며 잔소리하던 사귄 지 이틀 된 친구의 말처럼 초점 안 맞는 사진뿐일까 두렵지만, 내겐 글로 남긴 이 긴 긴 회고가 더 의미 있는걸. (라고 미리 나 자신을 위로해 본다)


온갖 종이를 다 붙이며 기록하는 일기장에 귀여운 쪽지를 추가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마저 행복했던 독서. <글렌굴드 피아노 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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