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 대한 환상이 컸다. 어디서부터 온 환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많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연인끼리는 뭐든지 함께 하는 거라고,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사랑해 주는 거라고, 희생과 헌신이 연인 간에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연애를 하면서 나는 특별해졌다. 누군가와 안정적이고도 둘만 아는 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매혹적이었다. 누군가의 연인이 된다는 것은 상대에게 특별한 지위를 내려주는 것이고 내가 그 특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누군가와 주고받는 마음보다는 내 외로움이 채워지는 것이 훨씬 더 좋았다. 친구에게 하지 못하는 말도 연인 사이에서는 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랑과 관심을 연인에게서 충족해 왔던 것이다. 연인은 누구보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존재였다. 동시에 누구보다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당연했다. 내가 나를 온전히 내맡겼기 때문에.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시간 동안, 행복해하는 상대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집착과 소유욕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감정이다. 나 없이도 잘 살 것 같은 그 사람에게서 불안함을 느꼈다. 물론 그 불안을 겉으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나의 못난 모습에 상대가 떠날 것이 두려웠으니까. 내 연애는 언제나 불안의 연속이었다. 상대에게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나의 깊은 속 마음을 혼자서는 처리하지 못했다. 그저 상대가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는 증거를 수집하는 것에 급급했다.
연인이었던 상대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된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다. 사실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라기 보다 더 이상 나에게 사랑을 줄 대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어른스럽게 서로를 존중하는 사랑보다는 어린애처럼 받기만 하는 사랑을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정말 받기만 한 연애를 한 것은 아니었다. 상대에게 나는 늘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돌려받고 싶었다. 이만큼 줬으니 너도 나에게 그만큼을 달라고 무언의 강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착한 여자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헌신하고 희생하는 착한 여자는 고리타분하고 쉽게 질리기 쉽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상하게도 연인 사이에서 나는 늘 희생하고 헌신하는 여자였다.
친구들은 말했다. 네 남자 친구는 너랑 헤어지면 평생 후회할 거라고. 나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은연중에 그게 사실이기를 바랐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나를 잊지 못 하기를, 나를 소중히 여겨주기를 바랐다. 좀 더 솔직하자면 나 없이 행복해 지는 상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누군가에게 진실한 마음을 전하고 사랑을 주기에는 나조차 가진 사랑이 없었다. 그래서 지난 연애를 떠올려 보면 나 자신이 안쓰럽다. 왜 내 시간 전부를 오롯이 그 사람에게만 썼는지, 왜 나 자신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았는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해 줄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서.
그것은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내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 상대와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니.
사랑받을 자격은 타인이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걸 너무 늦게서야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