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기후 위기란 대체 뭘까.
우선 ‘기후’는 ‘어떤 지역에서 나타나는 최고 30년간의 날씨를 종합한 것’이다. ‘이상 기상’은 ‘어떤 기상 요소(기온, 강수량 등)의 관측 값이 한 지역에서 예년 기간인 30년 동안에 관측되지 않은 것이 나타났을 때를 이르는 말’이다.
2018년 8월 1일. 강원도 홍천. 기상관측 사상 최고 기온 기록.
2019년. 6년 내 최저 강수량을 기록하며 마른장마.
2020년. 역대 가장 길었던 장마(52일). 한반도를 연이어 덮친 3차례의 태풍.
2021년 10월 서울. 63년 만에 최저 기온 기록.
2022년 여름. 장마 아닌 우기처럼 내린 집중 폭우.
2023년. 전 세계 평균 기온이 가장 높았던 한 해.
지난 6년간 ‘이상 기상’으로 인해 벌어진 우리나라 일기(日氣) 현황이다. 이것이 ‘이상 기상’이다. 이러한 일이 심상치 않은 주기로 나타났을 때 기후 위기에 처해있다고 말한다. 즉, ‘기후 위기’는 극단적 이상 기상 현상의 주기가 단축되어 빈번하게 발생함에 따라 물과 식량 부족, 생태계 붕괴, 해수면 상승, 해양 산성화, 가뭄 등으로 회복하기 힘든 위험에 직면한 상태를 말한다.
2015년 8월. 유튜브에 영상 하나가 올라왔다. ‘sea Turtle with Straw up its Nostril - "NO" TO PLASTIC STRAWS’라는 제목의 바다거북 영상인데, 코스타리카 해안에 사는 바다 거북이의 코에 박힌 플라스틱 빨대를 제거해 주는 영상이다. 9년 전에 올라온 이 영상의 현재 조회수는 1억 뷰를 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많은 일반 대중이 ‘기후’에 본격적인 관심을 두기 시작한 시점은 이 영상이 대중들에게 알려졌던 때라고 생각된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2015년은 파리 기후변화 협약을 맺은 해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이 영상을 아직 보지 못했다. 코에 박힌 빨대를 빼는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기후 위기’라는 제목을 단 기사나 칼럼, 콘텐츠가 꽤 많이 쏟아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꽤나 많은 정치인이 기후에 관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내놓고 있으며, 이익을 위해서라면 스스럼없이 차악을 감안하던 기업들 역시 적극적인 모션을 취하고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하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런 것 같은 느낌을 주고는 있다) 더불어 대중들 역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환경보호,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나름의 적극적인 행동을 실천하고 있다. 현재 지구가 처한 상황이 심상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무척 심각한 상황에 부닥쳤다는 과학자의 말이 ‘드디어’ 통한 것이다. (사견을 조심스레 덧붙이자면, 과학자와 전문가들의 ‘말’이 일반 대중들의 행동 변화를 촉진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기후 위기를 직, 간접적으로 겪고, 실제로 ‘체감’하고 있기에 비로소 반응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에 나 역시 기후 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개인적인 실천으로만 만족하며 지내려 했다. 하지만 기후 위기에 대해 알아가면 갈수록 내가, 우리가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부닥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 더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기후 위기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처음에 기후 위기를 단순히 기상 이변으로 인한 일시적 일기 현상으로 설명했지만, 기후 위기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국소적인 기상 이변으로 일부 국가나 도시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닐뿐더러, 지구 그 자체는 하나이기에 모든 원인과 결과, 과정이 서로 연결되어 흐르기 때문이다. 어딘가가 추워지면 어딘가는 반드시 더워지고, 어딘가가 폭우에 시달리면 또 어딘가는 지독한 가뭄으로 고통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후 위기를 대처하는 마음가짐과 행동이 단지 이상 이변을 해소하기 위한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기상 이변, 기후 위기로 파생되는 문제는 지구 생태계 전체와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난 기후 위기를 정말 극복해 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한 사람의 근본적인 인식을 바꿔야만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후 위기를 제대로 직시하고, 관심을 가지고 해결하려 하는 한 사람이라면 인간의 삶 양식, 가치관을 비롯한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후 위기는 과도한 탄소 배출이 주요 원인이긴 하지만 그것을 시작하게 된 것은 결국 인간의 습성과 본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그동안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직시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사유해 봐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이 지구 환경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어쩌면 그보다 훨씬 많이), 인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좀 더 나은 삶, 좀 더 편안하고 즐거운 삶을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지구 환경 문제들을 무시하며 많은 일들을 벌이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류가 지구에서 산다는 것이 인간만 지구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만을 위해 지구가 존재하는 일 따위는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한 종(Specie)에 관련된 생태계에 문제가 생기면 거기에 연관된 모든 종이 영향을 받는다. 지구 평균 온도 상승으로 인한 기후 위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생태계가 위협을 받고, 수많은 종이 멸종되어 가고 있다. 그게 어떤 식물이고, 어떤 동물이던지 간에, 멸종되고, 되어가는 종들의 이름은커녕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도 인간은 분명히 그들과 연결되어 있고, 영향을 받는다.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인간 위주로 판단하고, 설계하고, 우선시하고 결정을 내리는 모든 사안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당연한 것들’에 대해, ‘당연히 여겼던 것들’에 대해 깊이 사유해 봐야 할 시기가 현실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기후 위기는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