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같이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길을 떠났다. 이른 시간이라 완전한 밤처럼 어둡고 조금 쌀쌀했다. 잃어버릴 뻔한 바람막이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 주었다. 일어나서부터 출발 직전까지 비가 조금씩 내려서 걱정을 했지만, 막상 출발을 하니 비가 그쳤다. 다행이었다. 은은한 주황빛 조명을 받는 대성당의 모습은 어제와 다른 느낌을 풍겼다. 그 시대를 더욱 상상하고, 몰입하게 만들었다. 규모가 큰 도시여서 벗어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널따란 도로, 산책로, 몇몇의 공원, 광장을 지나는 동안 하늘은 조용히 밝아졌다. 새벽 공기와 빛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빛나는 가로등과 가로수는 순례길에서 가장 좋아진 풍경 중 하나가 됐다.
도심을 벗어나 익숙한 노란 화살표와 시골길을 마주했다. 어느덧 태양도 적당히 떠서 하늘은 하얀색으로 변했다. 곳곳에 먹구름처럼 큼직한 구름들이 낮게 깔려있었다. 계속 걷다 보니 멀리서 비석 하나가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502km가 쓰여 있었다. 비록 버스를 타긴 했지만, 어느새 300km 가까이 걸어왔다. 놀라움 보다 걱정이 앞섰다. 걸어온 300km보다 걸어갈 500km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사람 하나 없는 길을 계속 걸었다. 정말 순례길 느낌 나는 길을 혼자서 온전히 느끼며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 더구나 하늘이 계속 흐릿하고, 범상치 않은 먹구름이 계속 떠있어서 걱정했는데 비가 오지 않아서 감사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비슷한 시골길을 걷는 것 자체가 지루함으로 다가와서 몹시 난감했다. 그렇게 묵묵히 길을 걷다가 문득 이 순례길 과정이 지금까지의 내 삶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초반에는 나의 어린 시절처럼 몹시 활기찼고, 기대가 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힘듦을 느낀다. 마치 학창시절에 느꼈던, 혹은 취업을 하고 느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고난과 같았다. 또 학창시절 언제나 함께일 것 같았던 친구들과 떨어져야만 했던 경험을 하며 느꼈던 것처럼, 순례길에서 우연히 만난 일행과 다른 일정으로 혼자가 되어 길을 걷는다. 순례길이 내가 살아온 삶 같았다.
어제 쉬어서 그런지 한동안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역시나 15KM 지점부터 극심한 고통이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욕심을, 첫 여행에 욕심을 부린 것 같았다. 육체적으로, 마음적으로 여러모로 힘들다. 정말 힘겨운 날을 보내고 있다. 앞으로 너무 많은 날이 남았다. 내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매일같이 느끼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당장 집에 가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한다. 왠지 슬프고, 힘들다.’ 앞으로 어떨지, 어떤 판단을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모든 작물이 베어져 나간, 끝없이 펼쳐지고 이어진 밭을 지나며, 그곳 정 가운데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를 지나며, 누군가 하나씩 쌓아 올린 돌무덤을 지나며, 생각했다. 그 위로 곧게 뻗은 길을 걷는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내 의지로 온 곳이었지만, 나는 그 질문에 여전히 명확한 답을 할 수 없었다. 그 질문에 좋은 답을 하기에는 너무나 고되었다.
22km를 걸어 마을에 도착했다. 워낙 작은 마을이어서 숙소는 금방 눈에 띄었다. 사립 알베르게여서 시설도 깔끔하고 좋았다. 나는 루틴 대로 씻고, 빨래를 했다. 그리고 숙소 앞에 있는 매점에서 간단히 빵과 음료를 사서 점심을 때웠다. 어제부터 몹시 궁핍한 식사를 한 탓에 정신적으로 힘들었지만, 오늘은 숙소에서 제공하는 빠에야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버텼다. 내 첫 빠에야이기도 했다.
날도 흐렸고, 몹시 피로 했기 때문에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개운하긴 했지만 찌뿌둥함을 털어내기 위해 침대에서 벗어나 숙소에 있는 마당으로 나갔다. 풋살장 하나 크기였고, 선배드 몇 개가 놓여있었다. 그곳에서 잠깐 쉴까 생각 했지만, 잔디에 있는 벌레를 조심하느라 그러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시간이 됐다. 학수고대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열 댓 명이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에 식기들이 놓여있었다. 하나 둘 자리를 채웠고, 금세 다 채워졌다. 주인이 간단히 환영인사를 한 후, 오늘의 메뉴를 소개하며 먼저 샐러드와 빵을 내주었다. 나는 텅 빈 내 위를 조금씩 달래며 식사를 시작했다. 곧이어 완성된 빠에야가 나왔고, 최대한 꼭꼭 씹으며 허겁지겁 정신없이 먹었다. 어제의 궁핍한 식사를 생각하면 엄청난 호강이었다. 너무 맛있었고, 무엇보다 따듯했다. 먼저 퍼준 한 접시는 금방 해치웠고, 두 번째 접시도 가득 퍼서 먹어 치워버렸다. 나헤라에서 중국식 볶음밥을 먹을 때처럼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 끼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행복은 풍족함에서 온다고 하는데, 그 행복을 더욱 충분히 느끼려면 결핍이 꼭 필요한 것 같다는 약간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내 옆, 앞자리에 일본인 여자 세 명과 미국인 여자 한명이 앉아있었는데 그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했다. 일본인 두 친구는 현재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다고 했다. 자기들은 일을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휴가를 써서 이곳을 온다고 했다. 그렇게 조금씩 나눠서 순례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눠서‘ 이 길을 걷는다는 발상을 한 것 자체에 놀랐다. 나는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걸어내야만 한다는 생각만 했는데 그럴 수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이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니 내 생각이 편견이고, 순례길에 대한 편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 누구도 이 길을 단번에 걸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사전 조사 때 인터넷 카페에서 한 달 동안 그렇게 걸었다는’한국인‘들의 이야기만 들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일 뿐이었다. 또 내가 순례길 마치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남부를 한 달 동안 여행할 계획이라고 말하니 이런 저런 추천을 많이 해주었다. 특히 꼭 바르셀로나에서 해야 할 것 중에 축구를 추천해줬고, 나도 할 계획이 있어서 마침 여행 기간 중에 있는 엘클라시코 경기 예매하는 법에 대해 팁을 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