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1
오늘은 7.5km만 걷기로 했다. 여유롭게 출발 준비를 마친 후, 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었다. 기본적인 빵과 요거트, 주스, 커피였다. 양 것 식사를 하고 식기를 정리하려 할 때 호스트가 티켓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처음에 딱히 제재가 없었고, 다른 순례자들도 그냥 자리에 앉아서 바로 먹길래 그래도 되는가 보다 하고 따라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마터면 무전취식을 할 뻔했다. 나는 당황했고, 서둘러 수습을 했다. 전날 만났던 한국인 순례자들과는 완전히 이별을 했다. 내 일정도 그렇고, 그들의 일정도 예정과는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주 여유롭게 길을 걸었다. 거리가 적기도 했지만, 달라진 마음가짐과 일정으로 인해 고통이 있었지만 견딜 만하다고 여겨졌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은 최대한 이렇게 여유 있게 일정을 소화하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봄에 다시 와서 설렁설렁 넘겼던 곳들을 제대로 걷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곤 속으로 순례길이 이런 식으로 다시 이곳에 오게 만드는구나, 다른 좋은 기회를 또 주는구나 생각했다.
걷기 시작했을 때에는 어제와 같이 감기기운이 있었는데 걷다 보니 괜찮아졌다. 다행이었다. 길을 걷던 와중 무척 매력적인 다리 하나를 만났는데 때마침 어떤 외국인 순례자가 나에게 다가와서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호의를 보였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 순례자에게 인사를 하고, 똑같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2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고, 숙소로 곧장 갔다. 그런데 지도상의 위치는 맞는데 입구를 찾지 못해서 한동안 헤매다가 건물 한편에 있는 철문 너머 고양이가 있는 걸 보고 그에게 여기가 혹시 알베르게가 맞느냐고 물어봤다. 고양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내 주위를 서성이기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건물에서 사람이 나왔고, 그가 나에게 다가와 순례자가 맞느냐고 묻고는 문을 열어 환영해 주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꽤 큰 잔디 마당을 지나 숙소 야외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된 곳으로 안내했다. 그는 나를 그곳에 앉히고 아직 청소가 끝나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기다리면 된다는 말과 함께 같이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 안에서 다른 순례자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 레몬차를 마시지 않겠냐고 친절하게 물었고, 나는 얼떨결에 그러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는 금방 나에게 꿀을 탄 레몬차 한잔을 건넸다. 그리고 그곳에 앉은 몇 명의 순례자들이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건넸다. 처음엔 곤혹스러웠지만, 예상외로 수월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내 모습에 놀랐다.
한 시간쯤 지나서 체크인을 했다.
굉장히 친환경적인 숙소였다. 곳곳이 나무 구조물로 되어있었고, 요가원에서나 볼법한 소품들이 곳곳에 가득했다. 사실 내가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요가를 진행하기 때문이었다. 지난번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체크인을 하며 오늘 요가를 하는지 물었는데 한다는 답을 받아서 무척 기뻤다. 나는 체크인을 마치고, 개인 정비를 한 후, 침대에 누워서 휴식을 취했다. 점심은 숙소에 오기 전에 마트에 들러서 산 빵과 과일로 해결했다. 참고로 이곳은 여태 내가 순례길에서 머문 숙소 중 가장 마음에 들고, 낭만적인 곳이라고 생각한다. 강아지와 고양이도 많고, 그들이 뛰어놀기 충분한 잔디 마당도 있고, 무엇보다 채식을 하고, 요가를 하기 때문이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노을이 질 무렵이 됐고, 요가를 할 사람을 불러 모아 별도의 장소로 안내했다. 그곳은 무척 아담한(약 5평 정도 되는) 곳이었다. 좁은 공간에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들어가서 조금 협소 하긴 했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뒤쪽 구석에 앉을 생각으로 제일 먼저 들어갔는데 그곳에 있던 요가 선생님으로 보이는 새 하얀 단발머리의 젊은 여성 분이 나를 제일 앞에 앉혔다. 처음엔 무척 당황했고, 어색했지만 알고 보니 그곳은 제일 좋은 명당이었다. 딱 그곳에만 일정 시간 동안 노을로 물든 햇살이 창문 틈으로 비쳤는데 이것이 내가 요가를 하는 동안 기분을 훨씬 좋고, 풍요롭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방으로 들어올 때쯤, 선생님이 앞에서 향을 태우고 요가를 시작했다. 인요가를 진행했는데 무척 느린 플로우였다. 그가 영어로 진행을 하는 동안 부가적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사실 나는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는데, 오히려 그 점이 나의 마음을 더욱 편하게 진정시켜 줬고, 몰입시켰다. 햇살과 선생님의 목소리, 솔솔 부는 바람, 나무 타는 냄새, 이 모든 게 완벽히 어우러져 경이로울 만큼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한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흘러갔다. 한국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요가를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 이곳을 다시 오기 위해서라도 순례길을 다시 걷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요가가 끝나고 바로 저녁 식사가 진행됐다. 식사가 시작되기 전, 그 마을에서 함께 사는 분들인지, 이 알베르게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람인지 모를 몇 명의 사람이 기타를 치고 몇 가지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나는 연이어 멋진 경험이 펼쳐지고 있는 사실에 감격했다. 무엇보다 한국인 하나 없이 외국인들 틈에 둘러 쌓여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기분 좋게 만들었다.
식사는 완벽한 채식 식단이었다. 수프를 비롯해서 몇 가지 샐러드가 나왔는데 정말이지 완전한 채식만으로도 이렇게 배불리, 풍족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때가 나의 첫 채식 식사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한 없이 친절하기만 해서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모든 것이 도네이션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이었다. 한편으로는 이 사실이 나를 더욱 힘겹게 했다. 마음 같아서는 호텔에 버금가는 비용을 지불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내게 유감이었다.
침대에 누워 오늘만 같은 날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오늘은 정말이지 동화 같은 감동이 있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