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D+18, 19

by 지안

나만의 방식대로 순례길을 걷겠다는 결심을 한 후, 컨디션 조절과 발 회복을 위해 레온에서 이틀 동안 머물기로 했다. 특히 며칠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 발로 땅을 디디면 송곳으로 발 아치 부분을 푹 찌르는 고통과 근막이 찢어지는 느낌이 극심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족저근막염 같았다. 초반에 관리를 잘해주지 않으면 평생 짊어질 수도 있다는 말에 쉬기로 결정했다. 새벽에 두 번이나 잠에서 깼다. 한 번은 꿈에서 무척 선명한 달과 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왜 그런지 편한 곳에서 잠만 자면 꿈을 꾸고, 잠을 설치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지만, 개운하지는 않았다.

조식은 빵과 달걀, 생 오렌지 주스, 요거트였다. 다른 순례자들은 이미 길을 떠난 후였다. 나는 느긋하게 주인과 짧은 대화를 하며 식사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한 후, 다음 숙소로 향했다. 가는 길 도중에 대성당을 지나쳤는데 성당 앞 광장에서 같이 묵었던 순례자 두 분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어주고 인사를 하고, 진짜로 헤어졌다.

다시 숙소로 가는 길, 광장에 장이 열렸다. 생각보다 규모가 있어서 온갖 것들을 팔고 있었는데 인상에 남은 것은 항상 유럽 시장을 보면 나오는 꽃 상점이었다. 이것저것 둘러보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발이 무척 아팠기 때문에 곧장 숙소로 갔다. 빠른 시간에 와서 체크인을 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있었지만, 힐끗 거리는 나에게 안에 있던 한국인이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줘서 곧장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깔끔하게 운영되는 알베르게여서 첫인상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우선 샤워를 하고, 어제 못한 빨래를 했다. 그리고 곧장 근처 큰 마트에 갔다. 거의 이마트 급으로 큰 매장이었다. 간단하게 점심과 저녁거리를 사려고 이곳저곳 둘러보았는데 전과 달리 선택지가 갑자기 많아지니 결정 장애가 왔다. 결국 호밀 빵과 달걀, 과일 몇 개, 햄, 고기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점심은 달걀과 햄을 구워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너무 평화로웠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 하루 정도 더 머물며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나는 달력과 일정표를 보고 약간 수정을 한 후, 숙소 호스트에게 연박을 신청했다. 그리고 내일이 일요일이라 마트를 닫는다는 걸 확인한 후, 곧장 마트로 다시 가서 내일 하루 동안 먹을 음식을 쇼핑해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일정표와 날씨를 다시 봤는데 사리아(최종 목적지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마을)에서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한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서 고민했다. 일단 이 구간을 다음에 와서 다시 걷고, 지금은 그냥 점프를 할까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레온에서 약 100KM 정도 떨어진 폰페라다 까지만 걷는 일정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욕망은 나의 의지를 완전히 정복해 버렸다. 앞으로 날씨가 어떻게 또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거의 확실하게 생각을 굳혔다.

그렇게 일정을 일단 수정하기로 하고, 저녁을 해 먹었다. 달걀과 소고기를 구워 먹었고, 레몬 맥주를 곁들였다.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이 저렴한 가격이었기 때문에 더 좋았다. 방으로 돌아와 일기를 쓰고, 뭔가 가벼워진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레온에서의 이튿날이다. 이곳에서 하루를 더 묶겠다는 결정을 하고 잠을 자니 모처럼 편히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도 무척 개운했다. 좀 더 늦게까지 누워서 늦장을 부리고 싶었지만, 아침도 먹어야 했고 무엇보다 평소의 신체 리듬을 지켜야 앞으로 있을 일정에서 덜 힘들 거라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침대를 벗어났다. 2층 침대에서 내려오는데 발을 땅에 딛는 순간 소름 돋는 고통이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역시 오늘도 쉬기를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디 이틀의 휴식이 보답해 주길 기대했다.

주방으로 가니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제 사놓은 달걀과 햄을 구워서 똑같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씻고, 잠깐 숙소 밖을 나가 상쾌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간단하게 스트레칭도 했다. 순간 행복함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전체적인 일정을 수정했다. 순례길 일정을 좀 줄이고, 포르투 일정을 7일로 늘렸고, 10.7일에 산티아고에서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리스본 7일. 스페인 남부 15일 일정으로 정했다. 그러다 보니 금방 시간이 흘렀고, 점심시간이 돼서 어제저녁과 같이 해 먹었다. 그러던 와중 지난번 체크인 때 문을 열어줬던 한국인 순례자가 다가와 함께 점심을 하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서 그렇게 했다. 나는 이미 차려놓은 음식을 나눴고, 그는 냉장고에서 토르티야와 와인. 올리브를 가져왔다. 덕분에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며 더욱 풍성하게 점심을 즐겼다.

점심을 먹고 다시 침대로 가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 유튜브로 여러 영상을 봤다. 그동안 등한시 했던, 한국에서 일상처럼 누렸던 콘텐츠들을 보니 집에서의 일상이 너무 그리웠다. 그 안락함이 지독한 지루함으로 느껴져서 이곳으로 떠나왔는데 이곳에서의 생활이 너무 궁핍하고, 힘겹게 여겨져서, 심지어 한국에서처럼 지루하다고 느껴져서 혼란스러웠다. 심경이 복잡했다. 그렇게나마 핸드폰으로 한국에서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니 좋았다.

꿀 같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금방 저녁 시간이 됐다. 나는 다시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에 있는 나머지 식자재를 꺼내 저녁을 준비했다. 그러던 와중 또다시 점심때 함께한 순례자가 다가와 저녁도 같이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나는 즐겁게 맞이했다. 그는 다른 한국인 일행 한 명을 추가로 소개했고, 며칠 전부터 함께 걷고 있다고 했다. 라면과 토르티야, 토마토 샐러드, 고기와 맥주를 상에 놓고 보니 잔칫상이라 봐도 무방했다. 우리 셋은 긴 시간 동안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중국 이우 시장에서 있었던 이야기, 각자 그동안 순례길에서 느꼈던 감정이나 에피소드, 한국에서의 삶. 그리고 현재 내가 처한 상황과 결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고집스럽게 순례길 방식을 주장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들을 필요가 없고, 내 뜻대로, 생각대로, 믿음대로 자기답게 순례길을 걸으면 그만이라고 나를 응원해 주었다. 대부분 나의 고민을 이야기하면 지지해 주는 편이지만, 가끔가다 그럼에도 걸어내야만 의미가 있다는 사람들도 만난다. 난 속으로 그들의 생각도 존중하니, 내 생각도 존중해줬으면 하고 바라지만, 모두가 그렇지 않다는 아쉬움이 든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며 저녁 시간을 갖고, 다음날을 기약하기 위해 자리를 파했다. 그때 나와 비슷한 일정을 걸어서 몇 번 마주쳤던 한국인 커플이 다른 순례자 두 명과 체크인을 위해 숙소로 들어왔다. 그들과 나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또다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나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던 일행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체크인을 마치자마자 닭볶음탕 재료를 사러 나갔고, 밤 9시가 돼서 돌아와 결국 닭볶음탕을 해 먹었다. 이 늦은 시간까지 순례길을 걸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이 늦은 시간에 닭볶음탕을 해 먹는 집념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로비 한편에서 카모마일차를 홀짝이는 나에게 다가와 한번 맛보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국물만 살짝 먹어봤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외국에서 어떻게 이렇게 해냈냐고 물어보니 한국에서 고추장과 라면 수프를 챙겨 와서 만들었다고 했다. 다시 한번 경외감을 느꼈다.

나는 차를 다 마시고 침실에 돌아와 평안한 지금의 생태 그대로 잠을 청하려 했는데 불이 다 꺼진 그곳에서 몹시 시끄럽게 떠드는 다른 순례자 때문에 몹시 짜증이 났다. 나는 이어 플러그를 주섬주섬 꺼내 귀를 틀어막고 겨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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