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완전한 가을로 접어들어 새벽에는 상당히 추웠다. 덕분에 몇 번 잠에서 깼다. 알람이 울리기 몇 분 전 잠에서 깨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울리는 알람을 끄고 일어났다. 아직 자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암흑 속에서 핸드폰 화면 불빛으로 침구 정리를 한 후, 짐을 챙겨 복도로 나왔다. 간단히 세안을 하고 나오니 조식이 차려져 있었다. 오늘도 완전한 채식 식단이었다. 따듯한 수프와 견과류 요거트, 빵과 차가 풍족하게 있었다. 나는 적당히 배를 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네이션 통에 조식 값을 지불했다. 5유로 밖에 낼 수 없어서 속상했다.
동이 트기 전, 검푸른 하늘이 가득할 때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손에 꼽을 만큼 멋진 일출을 보았다. 무척 붉은빛을 띠었고, 선명했다. 적절하게 뭉쳐있는 구름들에 걸쳐있는 초승달도 고았다. 일출의 장관이 끝날 무렵부터 지독한 고통이 시작됐다. 길을 걸으면서 뭘 봤는지, 어떻게 걸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중간에 꽤나 중요한 생각을 한 것 같았는데 그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모쪼록 힘겨운 사투 끝에 목적지 전 마을인 아스트로에 도착했다. 이곳은 꽤나 큰 마을이었다. 아니,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좀 큰 곳이었다. 나는 우선 큰 마트에 들러 먹을거리를 샀다. 오늘은 오롯이 숙소를 중점으로 목적지를 정했는데, 그곳엔 뭔가를 살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 곳곳에는 매력적인 건축물과 성당이 있었는데 인상적이었다. 가우디가 지은 저택으로 보이는 건물도 있었는데, 거기서 서성이던 나를 본 한 현지인이 기꺼이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정말이지 순례자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친절을 베푸는 문화는 정말 멋졌다. 그 외에도 멋진 곳들이나 볼만한 것들이 곳곳에 있기는 했지만, 발이 너무 아팠기 때문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짧게나마 마치 초저가 패키지여행을 하는 것처럼 둘러보고 곧장 아스트로를 떠났다. 아, 이곳엔 기차역이 있었는데 곧장 타고 점프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잠깐 들기도 했다.
전 마을에서 아스트로까지 15KM, 아스트로에서 발데비에아스까지 2km를 걸어서 숙소에 도착했는데 마지막 2KM는 정말이지 견딜 수 없을 만큼, 중간에 택시를 불러서 가고 싶은 충동이 들만큼 힘겨웠다. 나는 얼른 체크인을 하고 점심 먹고 쉬려고 숙소로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그때 한국인 순례자 한 명이 다른 방에서 나와 인사를 건넸다. 나는 먼저 가방을 방 한편에 내려놓고 신발을 갈아 신었다. 그리고 주인이 올 때까지 한국인 순례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이 왔고, 무척 유쾌하게 숙소 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일단 깔끔했고, 무척 작은 마을인 탓에 1인 배드가 몇 개 놓인 방을 혼자서 쓸 수 있다는 후기 때문이었는데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내가 배정받은 방으로 갔다. 침대 위에 정성스레 내 영어이름이 쓰인 종이가 놓여있었다. 전날에 전화로 예약을 해놓았는데 주인의 친절한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내 옆 침대에도 똑같이 이름 쓰인 종이가 놓여 있었다.
짐을 풀고 곧장 씻고, 빨래를 해서 햇살이 잘 드는 곳에 널었다. 그리고 주방이 있는 별도의 공간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 먹고, 침대에 누워 한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쉬었다. 한두 시간쯤 지나니 어느 정도 피로가 풀렸고, 발 통증도 잠잠해졌다. 나는 몸을 일으켜 이어폰을 챙기고 나가 작은 마을을 가볍게 산책했다. 중간중간 제주도에서 자주 본 돌담들이 보였다. 순간 한국의 향수가 느껴졌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산책을 하다 보니 또다시 발에 통증이 올라왔고, 숙소로 돌아갔다.
저녁시간이 돼서 아까 만난 한국인 순례자를 주방에서 만나 함께 식사를 했다. 우리는 각자의 재료를 조합해서 고기를 구웠고, 밥을 지었고, 면 없이 라면 수프와 양파, 달걀만 넣고 끓인 달걀 국을 차렸다. 정말 감동적인 맛이었다. 역시 한국인은 밥에 국물을 먹어야 힘이 났다.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이 친구는 나와 동갑이었다. 그리고 순례길 도중 치러지는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보러 잠깐 마드리드로 간다고 했다. 이 친구도 정해진 순례길이 아닌 자기만의 순례길을 걷고 있구나 싶은 생각에 뭔지 모를 안도감과 위안이 들었다. 순례길 일정을 마친 후, 포르투갈과 스페인 남부 여행을 하는 일정도 거의 비슷했다. 우리는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자고 기약했다.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는데 유쾌한 숙소 주인이 다가와 철제통에 담긴 딱 봐도 고급스러운 쿠키를 줬다. 우리는 주인에게 몸 둘 바를 몰라하며 감사인사를 했고, 주인은 명량한 제스처를 취하며 별거 아니니 맛있게 먹으라고, 재미있게 순례길을 걸으라고 말해주고는 또 사라져 버렸다. 남겨진 우리는 이걸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다음 마을에 같은 숙소에서 머무니 그곳에 가져가서 함께 나눠 먹자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과자는 그가 챙겨 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사실 같은 일정이긴 하지만 우리 둘 다 혼자서 순례길을 걷고 싶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같이 걷기로 하지는 않았다.
뒷정리를 마치고 방에 돌아와 잘 준비를 다 한 후,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서 방명록 같은 걸 썼다. 상대적으로 한국말로 된 글들이 많았다. 모두 주인에 대한 칭찬과 감사였다. 나 역시 내가 이곳에서 겪은 감동들에 대해 후기를 남기고 주인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겼다.
방으로 돌아와 일기를 썼다. 무척 힘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는 하루였음에 감사하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