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구름에 가려서 일출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덕분에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다만 그 시점에 무척 시끄럽게 떠들며 길을 걷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멀어지기 위해 한바탕 뛰었더니 땀이 나서 약간 불쾌했다. 이제 길의 풍경이 달라졌다. 끝없는 평야는 거의 나오지 않았고, 고지대였기 때문에 구불거리는 산길을 자주 걸었다. 그 중간중간 무척 아담하고 예쁜 마을들을 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다만 험난한 돌길을 걸어서 발이 아파 온전히 즐길 수 없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숙소 도착 예정 시간이 생각보다 늦어질 것 같아서 평소보다 조급한 마음으로 걸었다. 폰페라다는 큰 도시였고, 많은 순례자들이 도착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잘못하면 숙소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내가 걷기로 한 마지막 날이었다. 오늘을 끝으로 기차와 버스를 이용해서 곧장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갈 예정이었다. 정말 걷는 게 끝이라고 생각하니 아쉽기도 했지만, 솔직히 홀가분함이 더 컸다. 마지막이라 조금 가벼운 발걸음이 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길을 걷는 와중 인터넷도 되지 않아 틈틈이 노래를 들을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발의 통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힘겹게 폰페라다에 도착해서 곧장 알아둔 숙소로 갔는데 다행히 딱 한자리가 남아서 무사히 체크인할 수 있었다. 방에는 2층 침대 2개와 1층 침대 1개가 있었는데 나는 또 운이 좋게 1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숙소는 모던했고,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지하에는 자전거 보관소가 있었는데 수리할 수 있는 온갖 장비들도 있었다. 또 한편에 순례길에서는 거의 보지 못한 빨래방이 있었는데 몇 개의 세탁기와 건조기가 놓여있었다. 거의 호텔에 버금가는 알베르게였다.
나는 이곳에서 이틀을 머물 예정이었기 때문에 빨래를 늦게 해도 됐고, 숙소에 도착하지 마자 짐만 풀고 숙소를 나갔다. 발은 여전히 아팠지만 마을 이곳저곳 무척 여유 있게, 마치 관광객처럼 구경을 하고, 대형 쇼핑몰에 갔다. 거의 한 달 만에 여의도 IFC몰 같은 곳을 구경하니 도파민이 치솟았다. 이것저것 사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지만, 순례길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니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앞으로 비가 온다는 예보를 대비해서 우산을 샀고, 이틀간 먹을 식자재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주방이 있는 휴게소에서 간단히 간식을 먹고 그동안 고생한 신발을 깨끗이 닦았다. 밑창을 보니 꽤 닳아 있었다. 발만 고생한 게 아니었다. 뭔가 마음이 짠했다. 그래도 이 신발이 아니었다면 내 발이 더 고생할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에 고마웠다. 신발은 나의 전우였다. 그리고 이틀간 밀린 일기를 썼다.
다시 방에 가서 잠깐 휴대폰을 보다 보니 저녁 시간이 됐고, 숙소를 나와 검색해 놓은 괜찮은 식당에 갔는데 시에스타 시간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잠깐 벙쪄 있다가 아까 쇼핑몰에서 본 버거킹이 문득 떠올라서 곧장 그곳으로 다시 갔다. 거리가 꽤 있었기 때문에 힘들고 무척 허기가 졌지만, 보름 만에 다시 햄버거를 먹는다는 생각으로 견디며 걸어갔다. 저녁 시간 때여서 그런지 아까보다 사람이 많았다. 나는 키오스크로 지난번과 같은 메뉴를 주문했고, 금방 나왔다. 그런데 전과 다르게 양이 무척 작아서 당혹스러웠다. 뭔가 주문 착오가 있는지 싶어서 직원에게 물어봤지만 내가 시킨 메뉴가 맞다는 답을 듣고 자리로 돌아왔다. 뭔가 미심쩍고, 찝찝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래도 햄버거를 맛있게 먹어 치웠다. 간간히 어린애들로 보이는 몇몇이 내 쪽을 아주 기분 나쁘게 힐긋 거리며 히죽 됐다. 순례길이나 비교적 작은 마을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대도시만 오면 이런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레몬 맥주를 샀다. 도시 건물 틈 사이로 일몰이 힐긋 거리며 모습을 비추었다. 아직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끝내버린 순례길의 마지막 노을은 역시나 정열적이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바로 씻고, 빨래를 마치고 나서 과자와 맥주, 일기장을 들고 휴게실로 갔다. 숙소 규모에 비해 사람이 적어서 한적했다. 대도시답게 모두 외출을 한 것 같았다. 밀린 이틀 치 일기를 휘갈겨 썼다. 걷는 순례길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니 뭔가 뭉클한 감정이 들기도 했는데 아직 실감 나지 않았다. 고됨이 끝났다는 현실에 홀가분한 감정이 컸기 때문에 힘든 여정의 끝에 오는 감동이나 벅참은 없었다.
폰페라다에서 이튿날이다.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그동안 순례길 일정이 체화된 바람에 저절로 잠에서 일찍 깼다. 게으름뱅이처럼 늦장을 부리며 다시 잠에 들려 노력했지만 다른 순례자들의 출근 준비 소리 덕에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냥 눈만 감고 누워 있다가 일어나 씻고, 어제 산 음식으로 아침을 배불리 먹었다. 숙소에서 마냥 늘어져 있고 싶었는데 불가능했다. 청소 시간 때에는 모두가 나가 있어야 했다. 나는 2시간 정도 노래를 들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책을 했다, 이제 완연한 가을 날씨여서 춥기도 했지만, 상쾌했다. 그리고 우연찮게 성당 앞을 지나는데 뭔가 홀린 듯 그곳으로 들어갔다. 예배가 진행 중이었고 짧게 머물다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씻고, 빨래하고, 점심을 먹었다. 누구였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흘리는 말로 한시 삼십 분에 시청 광장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고 해서 가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싱거웠다. 전통 복장을 한 여러 명이 악기를 연주하고, 경찰과 군인으로 보이는 인원들이 행렬을 하고, 시청 정문 앞에서 관료로 보이는 사람들이 악수를 주고받고, 다시 모든 인원들이 정렬을 해서 행렬을 했다.
뭔지 대충 짐작만 했을 만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숙소로 와서 이후 일정을 검토하고 낮잠을 오랜만에 자고 일어나서 핸드폰을 하다가 저녁을 해 먹었다. 이 먼 곳까지 와서도 쉴 때 고작 하는 일이 휴대폰 이라니 하고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저녁은 최악이었다. 토를 먹는 것 같았다. 냉동식품이었는데 처음에 분명 치즈 피자인 줄 알고 샀는데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음식인지 알 수 없었다. 뭔 지방 덩어리와 비계 덩어리를 뭉쳐 놓은 음식이었다. 그래도 내가 가진 식량의 전부였기 때문에 겨우 맥주와 먹어 치웠다. 힘겹게 저녁 먹고 유튜브를 보다가 잘 준비를 마치고 일기를 쓰며 마무리한다. ‘이제 순례길 일정이 막바지로 가고 있다. 아쉽긴 하지만 몸이 편해지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묘한 기분이다. 부디 이후 일정도 건강히, 무사히, 큰 탈 없이 좋은 추억 만들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