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4
어제 한국인 신부님이 아침 미사에 참석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해주었다. 다른 순례자분들은 흔쾌히 승낙을 했다. 나는 조금 망설였지만, 그것도 다시없을 경험이라는 생각에 그러기로 했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성당에 들렸다. 정신이 약간 몽롱 해서 그런지 저녁 미사보다 뭔가 성스러운 분위기가 더 느껴졌다. 미사를 마치고 인사를 나눈 후, 신부님이 모두의 손을 잡고 기도해주었다. 왜인지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뭔지 모를 벅찬 감정이 올라왔다. 그리고 각자 길을 떠났다.
걸으면서 신부님의 이야기와 지난 날 떠올렸던 생각들,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야곱의 무덤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프랑스길. 순례길의 역사, 의미. 그리고 이 길을 걷게 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쉬어감과 목적. 진정한 순례길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끝난 후 이어지는 삶에서 시작된다는 말. 순례자는 집 밖으로 나온 그 순간부터라는 말. 어수선했던 내 생각이, 순례길에 대한 마음이 선명해졌다. 더불어 고통과 피로로 느슨해졌던 초심도, 동기부여도 환기됐다.
미사 시간 때문에 출발 시간이 평소보다 늦었고, 길에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걸었다. 일출은 여느 때와 같이 멋졌지만, 사람이 많아서 감정이 흐릿했다. 1시간을 조금 넘게 걸으니 매번 반복되는 통곡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철의 십자가로 불리는 유명한 지점에 도착했다. 돌 무덤 위에 10m는 되어 보이는 철 십자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서서 한국에서부터 가방에 고이 모셔 두었던 나름의 기도문을 꺼내어 돌 틈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지난 날 한국인 순례자에게 받은 조그마한 태극기도 끼워 넣었다. 다른 순례자에게 기념 사진을 부탁하고, 조금 더 그곳에 머물며 마음을 다잡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추워서 금방 자리를 떴다.
힘들긴 했지만 목적지 마을엔 금방 도착했다.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이었고, 숙소는 전망 좋은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리조트 급으로 부대시설도 많고, 시설도 좋은 곳이었다. 컨디션이 계속 좋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숙소에서 쉴 수밖에 없었다. 다만 체크인을 하며 느낀 점인데 친절도는 그리 좋지 않았다. 내가 머물 방에 짐을 풀고 개인 정비를 하고 야외에 있는 빨래 건조대에 갔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방으로 돌아와 침대 곳곳에 빨래를 널었다. 그리고 오는 와중에 산 먹거리로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금방 저녁 시간이 됐다. 이날도 전날에 만난 나와 동갑인 한국 순례자와 함께 했다. 숙소에서도 저녁을 사먹을 수 있었지만 비쌌기 때문에 마을 중심부에 있는 식당에 가서 순례자 메뉴를 시켜 먹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았고, 맛도 좋아서 기분이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오려는 찰나에 풍채가 좋고, 긴 머리칼에 파마를 한 외국인 남성이 우리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그와 짧게 인사를 나누고 순례자라고 하니 자기도 순례길을 걷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문득 그와 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이 일었고, 기분 좋게 사진을 찍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마침 일몰이 질 때가 돼서 서둘렀다. 숙소에서 언덕 너머로 바라보는 일몰은 정말 일품이었다. 비가 그쳐서 방에 널어 둔 빨래를 걷어와 야외 테라스에 있는 난로에 대고 겨우 말렸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침낭에 몸을 우겨 넣고 제발 감기만 걸리지 말기를 바라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