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을 사는 나에게 묻는 질문
그곳을 마지막 방문한 후 1년이 지났다. 여든은 넘었는데 총기 있고 야무진 분이다.
야무지기만 하면 괜찮은데 너무 지나쳐서 탈이다.
젊은 시절 상당히 부유하게 살았던 것 같다. 아주 어릴 때 2차대전을 겪었고 어머니를 잃었다. 다행히 아버지의 재력은 이어져 부의 끈은
그녀의 삶에 여전히 풍요를 허락했다.
부유함이 늙으면 소용 없다지만,
그 기운은 상당히 오래간다.
외모 관리가 고급지고 철저하다.
실크 잠옷은 화려하기 그지 없고
먹는 음식도 아주 까다롭다.
그곳 근무자들이 하나같이 혀를 내두른다.
일 주일에 한 번 얼굴 마사지사가 방문하고, 발마사지도 자주 들른다. 양로원 독방의 디자인도 럭셔리 그 자체다. 몇 평 안 되는 방이지만 지난 시절 손때 묻은 엔티크 가구가 있다. 벽에 걸린 그림들은 유명 회화관을 연상케 한다.
18세기 조상이라고 걸려 있는 여인의 풍채는
방문하는 사람들의 기를 죽인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그룬트만 여사는 근무자들을 하녀 부리듯 한다. 걸핏하면 벨을 울려 가보면 기껏 물잔 삐뚤하게 놓여 있다고 바로잡아달라는 식이다. 그러니 그녀의 방에 알람이 울리면 어지간하면 곧바로 달려가지 않는다.
오랜만에 그곳에서 일을 했다.
여전히 고운 얼굴빛이 돋보였다. 진동기계를 팔에 대며 마사지를 하고 있던 그녀, 나를 보더니 씨익 웃는다.
1년 전 이 요양원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하도 이것저것 해달라고 해서
한 마디 쏴주고 나왔던 기억이 있다.
내 뒷통수에 대고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난리 법석이었다.
오랜만에 가긴 했지만 그분 얼굴을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그런데 웬일이래? 그룬트만이 뭔가 달라졌다. 친절하고 상냥하기까지 하다.
신경안정제를 많이 드신 것도 아닐 것이다.
다른 동료 왈 '치매증상 때문에
기억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참 신기하다. 치매를 앓고 나서 소녀처럼 상냥해진 그녀, 치매는 가슴 아프지만 어쩌면 본인이나 다른 이들에겐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이 참 아이러니하다.
혼자서 처리하던 그 많던 책상의 서류들은 아마 전담 변호사나 대리인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고운 그녀!
실크 잠옷도 그대로다.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 다른 사람일은 더더욱 그렇다. 만약 사람들이 사건들을 일일이 기억한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그래서 어쩌면 치매는 신이 내린 선물일 수도 있을까? 본인에게는. 물론 그를 돌보는 가족들에겐 힘든 시간이지만 말이다.
이제 육십인 마가레트는 알츠 하이머를 앓고 있다. 단발머리에 아직은 젊음의 기운이 느껴지는 그녀는 으레 그렇듯 자신이 깜박증에 걸린 줄 모른다. 옷을 벗는 줄도 모르고 입는 줄도 모르나 자신 안에서는 이미 자신이 한 것처럼 행동한다. 잠옷으로 갈아입히려 하면 자신이 한다고 아이처럼 버둥거린다. 하지만 스스로 할 줄 모른다는 것을 그녀는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라'는 말이 인간에게 주는 말이라면 우리 모두 마가레트 같은 무지의 인간이다.
마가레트는 특이한 증상을 가지고 있는데 늘 자신의 키만큼의 거울을 바라보고 대화를 한다.
누구랑 이야기하냐고 물었더니 자신의 친구 베아트리체라고 한다.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물으면 그걸 내가 다 어떻게 기억해? 라고 되묻는다.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친구라고 여기고 있다. 내 안의 또다른 거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가레트도 그룬트만 여사처럼 자신의 안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은 듯 보인다. 하지만 곁에 있는 우리는 슬프기만 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노년의 모습에 신경이 간다. 미리 걱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내 과거의 삶을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불안감이 인다. 특히 가족들에겐 최악의 질병이다. 순간순간 까먹는다. 늘 쓰던 글도 단어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버럭 겁이 난다. 중년이 주는 여유도 있지만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도 가중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의 재판정 일화에서
희망을 찾는다.
그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데 두려워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죽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 '죽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해준다면 모르지만...'이라고 했다.
알지도 모르는데 미리 불안은 금물이다. 치매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 치매 속으로 아직 들어가보지 않았으니 모를 일이다. 그저 나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고 할 뿐이고 죽음은 더더욱이다.
그래서 지금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친구들을 만난다.
P.s
가끔 요양시설에서 독일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인생을 느낍니다. 나치시대, 전쟁, 장벽이 무너질 때의 느낌 등을 들으면 역사의 실재를 마주하는 것 같아요. 제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삶을 살 줄 몰랐네요.
인생이 참 신기해요. 미래를 그저 알 수 없군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