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 내리는 기억

부제: 그날의 웃음도 함께 내린다

by 은빛루하

신발장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보이는 낡은 우산 하나.
살짝 찢어진 우산살 사이로 세월이 스며든 그 우산을
나는 아직도 버리지 못한다.


비 오는 날이면 나는 종종 여의도공원을 걷는다.
인적이 드문 길 위를, 그 낡은 우산을 들고 천천히 걷는다.
그러면 기억 속 장면 하나하나가 조용히 되살아난다.


오래전, 이곳은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로 가득한 광장이었다.
주말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뒤섞여 웃던 그곳에서
나는 열여섯 소녀가 되어, 그 풍경을 가로질렀다.


그날도 비가 왔다.
우산 속, 나란히 걷던 그와의 거리.
“너 샴푸 향 좋다.”
빗소리 위로 맴돌던 그 말이, 아직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사춘기 내내
그 사람은 조용히, 내 안에 머물렀다.


여의도에 비가 내릴 때마다
그날의 웃음도, 함께 내린다.


버리지 못한 우산을 들고 공원을 지나

한강변으로 방향을 틀어 걷다 보면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마주한다.
습기 가득한 공기가 코끝을 스치고,
그는 다시, 추억 속으로 들어온다.


유난히 하얀 손.
그 손이 들던 우산 아래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
비 속에 흩어졌지만,
그 미소만은 지금도 우산 속에 남아
내 곁을 걷고 있는 것만 같다.


요즘 나는,
비 오는 날이면 일부러 그 길을 돈다.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는 시간에,
그와 함께 걸었던 길 위를 천천히 밟아본다.

혹시나 바람이 그의 이름을 흘려줄까,
흩뿌리는 비가 그의 온기를 데려다줄까,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한다.


그리고—
부슬비가 유난히 얼굴을 스치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묻는다.


왜,
지금 그와 함께하지 못한 그리움만 안고 있는 걸까.



당신이 떠난 비 오는 공원.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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