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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아 Feb 26. 2021

겸손! 겸손은 힘들어!

#칭찬 잘 받기 #자격지심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참 겸손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같은 속담을 들으며 자라기도 했고, 본인이 아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면 '아는 척', '잘난 척'하는 것만 같아서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실수에 엄격하다. 실수도 실패도 결국 성장의 한 과정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잘 안된다. 실패할 것 같은 일은 아예 시작을 하고 싶지 않다.


심지어 육아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친구 엄마가 우리 아이의 칭찬을 하면 그냥 그것 그대로 인정해주면 좋을 텐데 꼭 다른 부족함을 끌고 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해야 겸손하고 괜찮은 엄마인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우리 첫째 아이는 또래에 비해 언어가 빠르다. 타인의 감정을 읽고, 위로하거나 공감하는 일을 참 잘하는 편이다. 메타 인지가 잘 발달된 아이이다. 그래서 주변 어른들에게 종종 칭찬을 듣곤 한다.


A: 어머 ㅇㅇ는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해요?

B: 에이 한국말 잘하면 뭐해요,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해요ㅋ


엄마인 나는 자꾸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하고 만다. 분명 나는 미국에서 자라날 우리 아이들이 모국어를 불편함 없이 사용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한국어를 바르게 가르치느라 애썼고, 아이가 잘해서 기특하고 고마우면서도 굳이 타인의 칭찬 앞에서는 아이의 부족함을 이야기해야 마음이 편하다. 겸손의 부작용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뒤에서 아이가 늘 듣고 있다는 사실이다. 듣고 있는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아 나는 영어를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말 것이다. 그냥 '감사합니다.' 하면 될 것을. 겸손하게 낮아지려 하다 보니, 나의 부족함을 들어 상대의 칭찬이 과분함을 증명해야만 할 것만 같이 반응하고 만다. 우리가 자란 환경에서는 늘 본인의 부족한 부분을 바라보고,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할 것을 권하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그야말로 겸손 권하는 사회다.


동서양의 문화 차이를 잘 보여주는 영상이 있어 덧붙여 본다.

https://youtu.be/G-OMvE_B0E8


그런데 내 안의 겸손함, 그 안을 좀 더 샅샅이 들여다보다 보니 어느 구석에는 자격지심도 숨겨져 있었다. 내가 나 자체로 괜찮다면 있는 그대로의 장점과 단점을 그대로 안아주고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에도 당당할 수 있을 텐데. 둘 다 드러내는 것이 꺼려지니 당당하기가 어렵다. 장점은 드러내기엔 부족하게만 느껴지고, 단점은 크게만 보인다. 나뿐만이 아니다. 내 주변의 정말 객관적으로 괜찮은 친구들이 지나치게 겸손한 모습을 보일 때 가끔은 안타깝다. 조금 더 당당할 수는 없을까. 왜 조금 더 뻔뻔할 수는 없는 걸까. 왜 늘 낮은 자리에서 고개를 숙여야만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처럼 느끼는 것일까. 그냥 좀 더 당당하게 내가 잘하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왜 자꾸 부족한 것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고 있을까.


그런데, 이제 세상이 조금 바뀌었다. 완벽함, 겸손함보다는 스스로를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매력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없는 데 있는 척, 모르는데 아는 척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솔직하게 세상에 드러낼 때 더 스스로 빛나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가진 강점을 잘 표현하고, 부족함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드러낼 때 '솔직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더 대중의 공감을 얻게 되었다. 최근 한국의 대기업 대표들이 직접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을 시도하거나, 예능 프로에 직접 출연하는 것도 그런 맥락의 마케팅이라 보인다. 이제 스스로를 셀프 브랜딩 할 줄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것은 '잘난 척'이나 '자랑'과는 조금 다르다. 나 스스로를 바로 들여다보고 솔직하게 다 내려놓고 타인과 소통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나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얼마나 솔직한가, 그리고 얼마나 나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우리 아이들이 나의 언어 능력과 공감 능력을 닮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아빠의 솔직함과 당당함도 닮으면 좋겠다. 섬세하게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고 배려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러다 나처럼 종종 관계에 매몰되지 않았으면 한다. 섬세한 사람들은 종종 관계에서의 주객전도를 경험하곤 한다. 상대의 마음이 섬세하게 읽히니 배려하게 되고, 배려하게 되니 내 것을 표현하는 것에 망설이게 된다. 내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했을 때 타인이 느끼게 될 감정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이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올 만한 것이라면 표현을 차단해버리고 만다. 이렇게 살면 피곤하다. 쉽게 관계에 지치고 만다. 아이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더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칭찬을 받으면 '에이 아니에요. 제가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은데요.'라거나 '다 다른 분들 덕분이지요.'라고 돌리기보다 조금은 당차고 발랄하게 '감사합니다. 칭찬을 들으니 더 열심히 하고 싶어 지네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신랑은 솔직하지만 어느 부분은 둔하기도 하다. 그래서 속이 편하다. 이런 성격을 소위 '성격이 좋다'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성격이 좋고 나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전의 양면처럼 섬세하고 공감 능력이 많으면 동시에 예민할 수도 또 금방 피로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신 털털하고 담아두지 않으며 타인을 잘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훨씬 둔하다. 남이 말해주기 전까지 상대의 상태를 잘 인지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각자 타고난 성향이 있겠지만 그 안에서의 장점을 잘 키워내주고 싶다.


그저 겸손하게, 자기의 감정보다는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만 우선하여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이타적인 것과는 다르다. 그렇게 감정과 생각을 묻어두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보다는 말해야 할 것을 적당히 표현하고, 또 스스로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부심도 갖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타인과 비교해서 잘하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에 대해 애정을 갖고 그것을 센스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아이들이었으면 한다. 그래, 아이들도 키우지만 아이들을 키우며 나도 아직 나를 키운다.


[*겸손은 힘들어 - 글의 제목은 반의적 표현으로써, 조영남 씨와 리쌍의 노래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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