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한다는 것
해피엔드. 2024
1. 14000원 / 2시간 넘는 줄 알았는데 아님
2. 재관람 의향 : △
3. 추천 : 보고 싶으면 보세요.
4. 동행 : 오히려 괜찮을지도
5. 해피엔드랬지?
감자는 도환이네 집 부엌에 서서 딴 친구에게 묻는다.
걔랑 대학에서 만났더라면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하고.
같은 질문을 영화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이걸 OTT에서 봤으면 끝까지 봤을까?
꽤 그럴듯한 가정 아닌가?
생각보다 요새 영화를 보러 나가는 건 쉬운 선택이 아니거든.
날이 더웠다. 28도에 육박한 기온. 잔뜩 습한 바람이 불고 눅눅한 햇빛이 비친 날에 봐서 적합했다. 영화 배경이나 오늘 날씨나 비슷했으니까. 지금 시기가 그렇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떻게 들어맞았다. 근데 친구도 그렇잖아. 시작도, 진행도, 그러려고 그랬던 게 아니었잖아.
이 영화를 본 것처럼.
원래는 썬더볼츠를 보려 했었다. 미적대다 보니 광고시간을 다 계산해도 도무지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포기했다. 기껏 나왔는데 집으로 다시 들어가기는 그랬다. 그런데.. 진짜로 보고 싶은 게 없었다. 하지만 어떡해. 집에서는, 카페에서는 아무거나 골라서 집중 못 한단 말이야. 내 집중력이 딸려서 안 된다고. 그래서 포기하고 골랐다.
진짜 포기하고 골랐고 그래서 중반까지는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 그게 중반인지 초중반이었는지 다 끝나갈 때쯤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그 정도로 자극적인 점이 없고 집중 포인트는 흐릿하다. 그렇다고 이런 인디 영화가 주로 그런 것처럼 분위기로 끌고 가는 느낌도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어. 오죽하면 그런 생각도 했다. 나는 저 배우가 잘생겨서 이걸 보러 온 거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니까 얼굴 보자, 얼굴. 했다. 근데 안 먹히더라고. 그래도 졸거나 빡쳐서 상영관을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근데.. 사실은, 잘 봤다. 필요한 영화였다.
아, 이렇게 피곤하게 집중하는 게 싫어서 이런 류 영화를 좀 오래 피했었는데. 난 원래도 생각이 너무 많고 다 내 중심이라서 이런 거 안 보려고 한단 말이야. 맨날 쓰고 정리해서 털어내는 게 그런 일들이라고. 뭘 써서 밖으로 꺼내 놔도 결국은 다 내 해석이고 내 얘기길래 그걸 좀 희석시키려 한 건데 번번이 실패였고 오늘도 그렇다. 그런데 성공이다.
성공이었으면 좋겠어. 왜냐면, 사랑하니까, 나는.
그래도. 아무튼 그러고 싶으니까.
아무리 봐도 일본 이름이 입에 안 붙어서 편의상 도환이와 박감자로 칭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재일교포 출신이라 박씨로 나오고, 미남의 감자 버전처럼 생겼고, 도환이는 쌍커풀이 생긴 모 도환 배우를 닮았다. 성씨는 말 안 했으니 꼭 누군가를 특정한 거라고 할 순 없어. 하여간 내 맘이다.
박감자와 도환이는 유치원 때부터 친구였다. 뭐 이런저런 추억을 공유했고 지금은 음악이 그 둘의 큰 공통분모다. 말이 음악이지 그걸로 그냥 일탈도 하고 스트레스도 푸는 건전한 불량 고삐리들이다. 담배 피우고 미자 출입 안 되는 클럽도 들어가니까 아주 건전한 류는 아냐.
하지만 깡패나 양아치는 또 아니니 영화를 계속 봐줄 수 있다. 그러니까 그냥 보통의 애들이다. 지금 유니클로에 가도 팔 것 같은 코튼 셔츠를 하나씩 입은 애들이 대거 나온다. 무신사나 유니클로 모델 같은 애들. 그냥 다국적 젊은이들이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교복을 입고 나오는 건데.. 미묘하다.
원래 청소년이란 좀 어른도 애들도 아닌 느낌인데 여기서는 더 그렇다. 그래 보인다. 몸은 컸는데 정서는 아직 안 큰 애들. 다행히도 굳어지지 않은 채 변화하며 성장하는 개체들.
영화는, 박감자와 도환이가 이런저런 기상천외하지만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고 재미는 더 없는 사건과 사람들을 마주치며 살아가는 시기를 며칠 보여준다. 그게 영화의 전부다.
그리고 둘은 졸업을 한다. 그들과 관심사를 공유하던 다른 친구들과도 갈라진다.
졸업, 뭣 같은 교장, 어른들, 람보르기니인지 페라리인지 모르겠는 아무튼 비싼 그 노란 차, 감시 체계, 노답인 차별이 계속되는 사회, 그보다 더 노답인 정치인과 사회 분위기.. 근데 다 그냥 부차적인 것들이다. 꼭 이 영화의 그것들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의 어떤 사건으로 바꿔도 이야기 전개에 크게 지장이 없을 것 같거든. 아, 그래서 이 영화가 좀 지루한가? 근데 그래서 어쩌면 와닿는 지점이 많았을 수도.
이야기 중심축은 저런 답답한 뭔가들이 아니라 극장 바깥에서도, 안에서도 그런 사건들을 조용히 지났고, 지나고 있을 두 사람에 대한 거니까.
새삼스럽게, 말하기 좀 뭣.. 하지도 않지만. 나는 친구가 별로 없다. 진짜 없다. 친구 머릿수로 카운트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다. 몇 명. 그 중 한 명이 은은히 생각났다.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였고 돌고돌아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같이 나왔다.
대학교 2학년 때 나는 전화를 걸어 그 친구에게 절연을 고했다. 유치하고 못된 일이다. 늘, 그 일을 떠올리며 '그게 그 때의 내 최선이었어'라고는 덮어 두지만 스스로는 알고 있다. 안다기보단 계속 묻게 됐다. 그게 최선이었을까? 하고.
아니었다는 걸 알았던 거지. 속으로는.
이유는 간단했다. 참을 수 없었거든. 박감자가 중간에 씹어뱉듯 말한 것처럼 질려 버렸다. 질린 거였다. 그 때의 나는.
남들 다 아닌 척 설잡대라고 부르는 학교에 들어와 지겨워 죽겠는 간호학과에 적을 둔 채 가방이나 들고 치장이나 하고서 학교를 오가는 게 너무 괴로웠던 시기였거든.
진짜 어쩌라고, 라는 말밖에는 안 나오지만 당시의 나는 정말 그랬다. 그런 나에게 그녀는 심심찮게 전화를 걸어 근황을 물었다. 그리고 본인의 근황을 알렸다. 재수 고민, 지방대생의 설움, 엄마와의 갈등. 또 재수나 반수 고민. 그리고 항상 마무리는 그거였다. 그래도 넌 서울 갔잖아. 그래도 넌 간호학과잖아. 나는 그 앞의 다른 이야기들은 모두 상관없었으나 그 마침표들이 정말 지겨웠다.
딴에는 위로일지 나를 추어올리는 그 무엇일지 모를 그 문장들이 어느새 너무 지겨웠고 그 지겨움을 참아주지 못하는 스스로가 괴롭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성격이 더럽고 이렇게밖에 못 말하는 사람이라는 전제를 전하고, 연락을 하지 말자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친구의 전화나 연락을.. 친구 된 마음으로 더 받을 수 없었거든.
내가 끊어낸 거였어서 미안하다는 말은 절대 안 했다. 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엄청나게 주지시킨 후 전화한 거였다. 친구는 그런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 고맙고 미안하다고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그녀는 참 성숙했다. 그런 면에서. 그리고 그 정도로 우리는 가까웠고, 비슷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흔히 관계에 균열이 간다고 한다. 나는 다르게 본다. 다르게 보게 됐다. 영화가 친절한 편은 아니다. 그래서 그냥 내 자의적 해석이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봤다는 뜻이다.
균열이 간 건 둘의 관계가 아니다. 박감자와 도환이 각각이다. 다행히 몸이며 머리가 다 굳어 버린 어른들이 아니라, 아직 생생한 고딩들인 그 둘은 깨며 성장한다. 뭐 때려부수고 반항하고 소리지르고 그런 게 아니다. 하긴 한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아니다. 난 또 다 큰 애들이 교복 입고 나오는 일본영화길래 그 흐름일 줄 알았는데.
자의식이 생겨 본인들의 환경과 성격과 목표와 욕망 비슷한 거, 공통분모가 아닌 정말 그 개인으로서의 관심사를 깨우쳐 가면서 그들은 각각 한 번씩 깬다.
데미안에 나오는 말, 성장하려면 세계를 깨야 한다고. 그 폼 나는 말을 빌려 쓴다. 그들은 깨어서 이 세상 속의 본인을 발견하고, 사실은 늘상 흔들리고 있던 지층 위에 선 자신들을 다시 한 번 마주한다. 성장. 진짜 성장이다. 그리고 달라진 시야로 아직 업데이트가 안 된 것 같은 상대를 본다.
감자는 재일 조선인이다. 핍박을 받는다. 그런데 성격은 강해서 그런 부당한 것에 반항하고 목소리를 낼 줄 안다. 슬슬 내기 시작한다. 마침 그런 뜻을 같이 하는 듯한 동지도 발견했다. 여학생이다.
도환이는 부족할 거 없이 컸다. 애교가 좀 많은 성정인지 감자에게 들러붙는다. 사랑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뭐 동성애 이런 느낌은 아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그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고 다시 음악이나 틀고 감자와 함께 장비나 훔쳐 동아리방에 갖다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끝나지 않는 가위바위보 내기 같은 거나 하면서.
그리고 그런 도환이는 시위를 하러 간다는 감자에게, 여친 생겼으면 말을 하지 그랬냐며 장난을 친다. 이어 비틀린 마음에 덧붙인다. 섹스하러 가냐고. 감자는 빡이 친다. 실망한다. 그런 애새끼 같은 친구의 모습이 질린다고 말한다. 딴 애한테.
그리고 카메라는 지하철역에서 이 멍청한 새끼야, 넌 생각이란 걸 좀 하고 살아라, 아니?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 소리지른다고 뭐가 달라져? 하고 고성을 지르는 그들을 멀리서 비춘다. 침을 튀기며 인상을 찌푸렸을 표정의 서로를 클로즈업해 보여주지 않는다. 희부연 전철역 구석의 흔한 고딩들인 그들을 화면에 잡고, 뒤로는 직장인이 한 명 지나간다. 어떤 관심도 주지 않고. 그냥 이 세상 속 둘인 거지.
그 언쟁은 어떤 기점으로는 안 나온다. 기점이랄 것도 없다. 그 싸움을 포인트로 뭐가 대놓고 전환되어서 갑자기 서로의 말을 다 씹고 주먹다짐을 하지는 않거든. 대신, 각자가 딛고 선 지층이 똑같이 움직이는 채로 그들은 천천히 흔들린다.
흔들려서, 세계라고 믿었던 것들이, 꿈이라고 붙들어 왔던 것이 깨지고, 금이 가고, 새로운 생각을 접하고, 받아들이고, 소리지르고, 주장하고, 실망하고, 기대하고, 서로를 곁눈질로 본다. 시선을 피하고 지레짐작하고 다시 실망한다.
원래 모든 인간은 다 다르다. 그리고 아마 대부분은, 공통점이나 공통의 관심사로 말미암아 가까워진다. 그게 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종류만 다를 뿐 그 양상은 세계 어느 시대와 인종들이 다 똑같을 테니까.
그래서 그 이후부터가 진짜다. 서로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된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흘러가는가. 친구라고 부르며 웃고 울고 온갖 쓸데없고 즐거운 일들을 함께한 상대가 아예 남이 되는 건 과연, 정말 시간문제인가. 왜, 우린 다르니까? 그게 맞는 건가? 그러니까, 언제는 안 그랬냐고. 언젠 똑같았어?
박감자는 원래도 재일 조선인이었고 도환이는 원래도 걱정 없이 큰 애였다. 그들은 늘 그랬고 세상은 갑자기 지옥이 된 게 아니었다. 언제나 지층은 어떤 방식으로든 흔들리고 있었으나 이제야 그들은 스스로를 알았고, 그 지진을 겪고 있는 거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은 다 달랐던 본인들을 그제야 제대로 보게 된 거였다. 자각해 균열하며 세상에 서 있던 건 본인들이었다. 금갔던 건 그들 자신이었지 그 관계였던 적이 없었다. 관계는 지층이 아니니까. 단단한 게 아닌데 어떻게 갈라져, 금이 가, 부서져. 애초 그렇게 생긴 게 아닌걸.
일본 영화를 봤으니 응당, 잔뜩 모아둔 일본 노래들을 들어야 했다. 영화관을 나와 아무거나 골라서 짙고 습한 저녁 속을 센티멘탈한 척 걸으려 했는데, 너의 이름은 주제가가 나왔다. 2016년. 수능이 끝났고 할 짓이 없었고 그 영화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나는 그걸 한 세 번쯤 봤다. 이듬해인가 더빙판이 나온 것도 봤다. 지금은 보라고 해도 못 본다. 그 땐 그렇게 재밌었고 신세계였는데 지금은 아니다. 어떻게, 왜 그게 그렇게 재밌었는지 의문이었다.
영화를 본 곳은 열이 받게도 병원이 있는 곳에서 환승을 해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은 걸 보러 출근길을 한 번 다시 거치기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불쾌했다. 그렇게 도착한 극장은 내가 신규 때 사카구치 켄타로의 시그널 극장판을 본 곳이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고 그냥 피칠갑을 한 그가 액션을 한다는 사실이 신선했던 것만 떠오른다. 이제는 그 배우를 그렇게까지는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고, 아니면 있었는데 내가 못 잡아낸 걸 수도 있고.
여하간 많이 변했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영화를 지금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그 좋아하는 배우를 큰 화면으로 보러 온 그곳을 아예 떠올리지도 못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고, 그 시간의 부피가 가볍지 않았던 탓이겠지. 그 시간 속에서 나도 많이 변했다는 반증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그 애니메이션과 그 일본 남자 배우만 그럴까. 그것들은 그냥 증거물의 잔해다. 세월의 흔적, 이라고들 할 그런 것들.
영화에서는 지진이 내내 나온다. 일본이 배경이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는 그걸 그냥 세상의 많고 많은 일들이라고 맘대로 해석했다. 난 그렇게까지 지진의 공포나 여파를 짙게 느껴본 적이 없으니까. 극중에서도 그게 엄청난 장치로 나오지는 않는다. 사람이 죽고 두려움에 떨고 하는 모습은 안 나온다. 그러니까, 지진은 그냥 그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며 거기서 나오는 크고 작은 잡음들의 집합이다. 지금 내가 딛고 선, 한국의 20대가 직면한 다른 것들 같은.
뭐냐고? 학벌, 지역, 욕망, 꿈, 취직, 취미, 취향, 정치성향. 그런 거. 꼭 20대일 필요는 없겠지. 그런데 내가 20대니까. 어차피 그것도 2년밖에 안 남았지만.
교복만 안 입었을 뿐, 내면이 애새끼인건 저 남고딩들이나 나나 똑같다. 아마 다들 그렇지 않을까. 그들이 교복을 입고 있는 이유는 청소년이기 때문이다. 아직 깨져서 성장할 여지가 있는 청소년들. 친구에게 전화해 너랑 나 오늘부터 남 하자고 싸가지 없이 통보한 그 때의 나나 지금의 나나 똑같이 애지만, 나는 좀 기름이 낀 애새끼다.
취직도 했고 자취도 하고 저금도 한다. 일하는 환경에 적응도 했고 거기서 비정상적인 것들을 많이 봤다. 병원이니까. 그렇게 어떤 것에는 무뎌지기도 했고 또 날카로워지기도 했다. 변한 거지. 근데 난 몰랐지. 몰랐다. 맨날 그렇게 살았으니까.
하지만 달라진 걸 알 때가 있다. 이렇게 바깥에 나왔을 때, 그리고 친구를 만났을 때. 상대가 디딘 지층과 내가 디딘 지층이 각자의 무게와 신은 신발이나 뭐 그런 거에 따라서 얼마나 내려앉고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를 비로소 자각할 때. 그 때 안다. 한 때 많은 것을 공유한 비슷한 상대라고 생각했던 이가 아예 달리 보일 때 내가 달라졌음을, 상대 역시 사실 그럴 것임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고, 아니. 사실 중반쯤부터 그 감자와 도환이를 보면서 나는 나와 상대를 떠올리는 거지. 그리고 묻는 거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하고. 우린 역시 갈라서야 하는 건가? 아니. 이미 멀어지고 있나?
그런데, 사실은 당연한 거잖아. 화장한 얼굴로 강의실에서 열심히 딴생각을 하던 그 때와 잔뜩 긴장한 채 일하고 죽을 만큼 싫어도 출퇴근해야 하는 지금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 남들도 그렇잖아. 5 더하기 5가 뭔지만 맞춰도 칭찬받던 시절과 취직을 위해 a부터 X까지 다 준비하고도 2563이 없다고 뺀치를 먹을 일을 대비해야 하는 지금이 어떻게 같겠냐고. 균열과 지진은 어쩔 수 없는 거고 당연한 거였다. 항상 그랬다. 이제야 티가 많이 날 뿐.
아빠는 가끔 내가 뭔가를 물으면 인상을 좀 쓴 채 애잔함을 섞어 말한다. '당연하지, 그럼' 이라고. 그리고 그 당연한 걸 알고서 어떻게 하는지 본인의 방식 같은 걸 말한다. 별로 재미는 없으나 어쨌든 아빠는 나한테 그래도 쓸 만한 조언을 주는 사람이었다. 아빠가 무슨 시대의 석학이나 현인은 당연히 아니고, 그냥 삶의 태도였다.
타고난 성격과 삼십 년을 '어쩔 수 없는 것들'로만 가득한 조직에서 생활한 짬의 콜라보 아닐까.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후 뭔가를 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내가 추측하기로는.
근데 꼭 아빠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다 그렇게 살잖아.
도환이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맞지. 세상은 어쩔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정말이다. 나가서 소리지르며 농성하고 한심한 교장을 가둬 놓는다고 크게 변하는 건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덮어두기만 할 수 없잖아. 어쩔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당연하기도 한 거라면, 알았으면 대응하면 되잖아.
그래서 도환이는 연단으로 나가 그 애살스러운 자기 성격대로 자백 아닌 자백을 한다. 그리고 퇴학당한다. 영화의 시작 때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육교에서 둘은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지만 마지막 장면은 아니다. 퇴학당한 도환이는 티쪼가리에 바지 차림이다. 그게 그냥 걔다.
멍청한 놈이니 질린다느니 하면서 속으로 손절을 꿈꿨을 감자의 세계에는 분명 균열이 왔을 것이다. 친구도 성장했거든. 원래 다르게 생긴 인간이었던 만큼 본인과 같은 결과값으로는 아니었으나 성장했다.
너 장학금 받는다고 좋아하는 엄마를 옆에 두고 벙쪄 있는 건 그 자각 때문이다. 한 방 맞은 것이다. 도환이가, 대가리 꽃밭인 줄 알았던 그 친구도 성장했다는 사실에.
둘은 육교에서 갈라진다. 당연히 관객 된 입장으로서 생각하게 된다. 둘은 다시 만났을까, 안 만났을까. 그런데 영화 제목이 뭐더라? 해피엔드잖아. 슬픈 뭐 어쩌고가 아니고 해피엔드라고. 누군가는 그렇게 자아를 찾고 각자 갈라져서 본인들의 세계에서 시위를 하는 대학생과 뮤직샵 알바를 하는 고교 중퇴생으로 살아가는 게 해피엔드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난 아니다. 그렇게 읽기 싫어. 왜? 어차피 처음부터 다른 존재였는데 이제 와서 호들갑을 떨며 멀어질 이유가 없다. 우린 원래 달랐다. 관계의 2막이자 진짜 시작인 것이다. 각성하고 성장한 각자를 구경하고 존중하고 가끔 교류하고 웃을, 또 다른 시작. 그들은 그럴 거거든.
왜냐면 내가 그렇게 보고 싶으니까. 조금 있으면 십 년을 채울지도 모르는 그 유치하고 한심한, 그러나 상대에게는 필히 상실이자 아픔이었을 그 절연의 사건이 나를 항상 찝찝하게 했던 이유를 알았다. 그 때의 내가 미숙했고, 사실은 그게 틀렸다는 걸 감지는 했던 거겠지. 이유를 못 찾았을 뿐.
사람들은 누군가를 딱 짚어 친구가 될 거라고 하고 연인이 될 거라고 하지 않는다. 찍어서 가까워졌다? 그게 항상 해피엔딩인가? 난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친해졌고 어쩌다 보니 공유하게 됐고 소중해졌다. 세상살이는 원래 좀 어쩌다 보니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거니까. 어떻게 알아. 내일의 지진, 오늘의 균열, 내일의 당신, 오늘의 나.
우리는 늘 세상 위에서 균열하던 중에 만나 그 마주 본 공간에 바다를 채웠다. 바다에 균열이 있어? 옮겨놓고 갈라낼 수 있어? 있을 수는 있겠지. 그런데 내가 아는 방법으로는 아냐. 만지고 헤엄치고 파도치는 걸 바라보다가도, 그 바다를 받친 우리가 흔들리는 걸 자주 감내해야 하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관계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 영화가 나한테 보여준 바로는 그래.
영화도 똑같잖아. 돈 내고 예매해서 보기 힘든 이유다. 나한텐 이게 필요해서 비슷해 보이는 걸 골랐는데 뚜껑을 열었더니 아예 다른 게 들어있는 경우도 있고, 알맹이는커녕 그 세계 자체가 너무 심연이라 되려 피곤해지기도 한다고.
난데없이 덥고 습해진 날씨도 감당하기 힘든데 그런 텁텁함까지 내 돈에 시간 써서 견디라고? 쉽지 않지. 웬만한 여유와 재력이 아니면 솔직히, 진짜로 쉽지는 않다. 만 원 이만 원이 아까워서가 아니고, 어른들은 그만큼 각자의 일로 정말 피곤하니까. 피곤해 굳어져 버렸으니까. 나도 그런 어른이다. 어른..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항상 이제 어딜 가면 주차는 하셨냐는 소리를 듣고 민증 달란 소릴 안 하니 맞긴 할 거야.
그런데 말했듯 아직은, 애새끼인 시절을 살고 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조금은 그럴 테니까. 균열을 마주하고 흔들리고 또 내 앞에서 그럴 상대를 마주할 거니까. 그게 친구를 보는 나였으면 좋겠고, 아주 조금은, 정말 아주아주 조금은 나의 상대들도 그러길 바라니까. 이 답 없게 늘 변화무쌍한 세상 위의 그들 역시 그랬으면 하니까. 이제서야.
응당 그래야 하는 날씨가 더워졌다고 죽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변한 걸 알았다고 관계를 억지로 잘라내려는 멍청한 짓은 틀린 거라는 걸 뒤늦게 안 내가 바란다. 또, 뭐를?
당연히 변하는 기온과 습도와 어쩌다 마주친, 이렇게 봐서 너무 다행이 되어 버릴 수도 있는 영화를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기를.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진동을, 진동에 부서진 나를 상대에게 먼저 설명해 주고 이해해 달라고 말하는 내가 되기를.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그게 먼저잖아. 나는 이렇게 변했고 너는 그런 것 같은데, 어떠니, 하고.
그리고 덧붙이는 거지. 사랑한다고. 그래도.
이어 한 가지 더해 바라는 거다. 순식간에 더워진 날, 바람막이는 입지도 않았는데 얼굴이며 다리에 땀이 맺히던 러닝 중에 바랐다. 습한 밤중인 지금도 바란다. 계절은 늘 계절이었으니까. 안 변하는 게 이상한 거고, 변하는 게 당연한 거였다고, 언제나. 세상의 많은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그 많은 것들이 가득한 세상에 선 나의 긴 글이, 뇌피셜뿐인 이 감상문이, 나의 그 누군가들에게 닿는 사과문이자 참회이자 러브레터 같은 것이길. 정말, 해피엔드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