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분노에 맞서는 방식

칼을 쥐고 세상을 볼 때

by 이븐도



파과. 2025


1. 티켓값 안 아까움 / 좀 긴 2시간.
2. 재관람 의향 : X
3. 추천 : O. 몰입감 쩔어줍니다.
4. 동행 : 옆사람 팔 붙들고 봐야 해서.
5. 그 매혹적 환상 속 칼질의 쓸모



연우진이 나온대서 봤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본 후의 감상도 똑같다. 연우진, 김봉회씨. 그러니까 작중 강봉회 의사 아니었으면 안 봤다고.


살인에 명분이 있나? 명분은 처벌에나 존재한다.

말마따나 인간 세스코인 방역, 청부살인업자들이 처벌을 논하는 것. 아주 멋진 일이다. 건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나쁘지 않지. 아니, 닥치고 꿇어앉아 들어야지.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서 본인들은 신성한 일을 한다는 칼 든 미친놈들에게 잘못 걸리면.. 나도 무사치 못할 테니까?

이건 그런 인간들이 나오는 영화다. 가 난, 위험한 사람들.







재밌고 피곤했다. 서브스턴스를 봤을 때 같았다.

영화는 현실의 불쾌함을 일깨워 놓고 책임은 지지 않았다. 그래도 여러 사람이 서로를 죽이려 해서 괜찮았다. 그 영화를 보면서는 스크린 속 주인공과 관객이 함께 불쾌하게 고통받아야 지만, 여기서는 둘 또는 다수가 자기들끼리 난투극을 벌이니까. 는 보기만 하면 되거든.


조금 덜 불쾌하지만 그만큼 더 지루하다. 싸움 구경, 좋지.

근데 그것도 편들어주고 싶은 인물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누구 편을 들지? 조각? 투우? 글쎄, 내가 왜?




주요 인물들 모두가 칼을 쓴다. 강의사의 어린 딸을 빼면..?

혹시 모르긴 해. 그 친구도 나중에는 칼이든 도끼든 들었을지. 여하간 그렇게 흉기를 들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각각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흥미로웠다. 왜냐면 스크린 밖의 나, 내 옆자리 친구, 저 뒤쪽 부부, 커플, 학생. 그거만은 다 똑같잖아.


단단한 몸과 의사 면허가 없을 뿐 분노를 채 사는 건 관객도 마찬가지까. 그래서 세 인물을 뜯어보기로 다. 어떻게 살고, 살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그게 이 게으른 영화가 나한테 던진 유일한 제라 그렇다.








조각의 칼 : 책임감


그녀가 과거를 되씹어대는 사람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매력 없는 인물의 서사를 어떻게 끌어가. 그녀에게 살인은 표상이나 수단이 아니다. 단지 일이다.


녀는 경계선을 아는 사람이다. 아내가 들어오자 김무열이 밴드를 붙여준 손을 감추는 젊은 시절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옳고 그른 것을 감별할 줄 알았다. 그래서 살인에 의미를 부여하고 꾸며내 말하지 않는다.

이건 어떻고 저건 별로라는 김강우에게 한 대답에서 보인다. 일 참 편하게 한다고, 재고 따지고 가려 받고. 그 말에 아마 그는 또 방역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말을 떠들어댔을 것이다.




그녀는 해야 해서 한다. 그렇게나 책임감을 가지고 하는 일이 결국은 남을 죽이는 일이었다는 게 그 인생과 정체성에 걸린 가장 큰 패착이다. 그래서 결국 이 인물을 사랑할 수는 없다. 영화관을 도중에 나오지 않을 정도는 되지만.




그녀는 본인을 강간하려던 미군을 살해한 후 김무열에게 싹싹 빌며 말한다. 제발 살려주세요, 내치지 말아 주세요.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본인의 생존이, 그 자리가, 이제는 지나치게 가엾지 않은 스스로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늙은 그녀는 사연을 되돌아보지 않지만, 당시의 그녀는 약했다.





너무 기대어 살아야 했던 탓에 본인을 세상에 온전히 존재할 수 있게만 해 주면 그게 무엇이든 했다. 그리고 그 때의 여린 자세는 김무열의 죽음 이후로 서히 사라졌다. 딸의 납골당을 다시 찾은 김무성에게 죽고 사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 길이 있어 가는 거지, 라고 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녀는 잔뜩 나이가 들 홀로 감당하고 기대지 않는 법을 익혔다. 변화해아남은 것이다. 멋있는 척하지 않는다. 살인이 쿨한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나마 그녀가 주인공인 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다.








투우의 칼 : 자기연민


반지를 가져오랬더니 손가락을 마디마디로 잘라 선물 상자에 담아 가져온다.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달라는, 죽일 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그리고 또 반복하는 게 있다.


조각에게 늙고 쓸모없다고 지겹게도 말한다. 당연한 사실을 자꾸 말해서 가만히 있었으면 안 보였을 결핍이 비친다. 누가 보아도 본인은 젊고 쌩쌩한 남자이며 조각은 정반대에 있다. 다 아는 이야기를 구태여 반복해 모욕을 주려는 그 시도가 우스워서 의심스럽다. 왜 저러지. 뭐 있나, 하고.




그는 어린 날의 스스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애를 납치해 데려간 해피 랜드, 그게 어딘데? 자신을 처음으로 따뜻하게 대해준 조각에게 함께 가고 싶다고 했던 그 놀이공원이다. 역겨울 정도로 성장하지 않았다. 이렇게나 재미가 없다니. 서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본인밖에 없는 인물이다.




세상을 향해 나를 좀 봐 달라고 소리쳐대고 있는데 그 방식이 완전히 틀렸다. 그리고 본인도 모른다. 세상에 화가 난 건지, 본인을 버리고 간 조각에게 화가 난 건지. 혼자 있는 드라마 없는 드라마는 다 찍는다. 조각은 그냥 가정부였다. 의미부여를 하고 기댄 것은 본인이었다. 쩔 수 없었겠지만, 커서도 그것만이 본인의 선택지였던 건 아니잖아.


증오하며 찾아댈 게 아니고, 그쯤 잊어버리고 잘 살았어야 했다. 언제까지 그 방구석의 어린 자신을 가여워만 하면서 살 건데? 나오는 장면마다 멋있는 척을 하고 속 다 보이는 행동을 해서 짜증이 났다. 슬슬 그 화려한 액션들이 질릴 때쯤, 그가 망태기를 풀어 강의사의 딸을 내던졌다. 시체와 핏자국과 총알이 날아다닌 바닥에.







나는 거기서 영화를 그만 보고 싶어졌다. 본인의 어린 날은 그렇게 소중해 지금까지 끌어안고 살면서, 남의 어린 시절은 얼룩지게 만들었다. 동정의 여지는커녕 화면에서 더 보고 싶지 않은 인물이 되어 버린 이유다. 인물만 싫어하면 되지 왜 그만 보고 싶었냐고? 어린애에게 남을 트라우마를 극중에서 구태여 재생산시킨 게 짜증이 나서. 그리고 한참을 보여 준다. 내게 안물안궁이 된 투우의 사연, 그들의 싸움 장면.


늘어진 난투극이 끝나자, 알약은 먹을 줄 아냐고 조각이 묻는다. 당연히 못 먹지. 그는 몸만 큰 어린애니까. 그게 제일 큰 문제다. 정신은 그대로에 몸만 강해진 어른.

배트맨의 조커는 본인이 비열하다는 사실은 알았다. 얜 아니다. 성찰은 없고 분노와 피해의식만 가득한 인간. 내내 꼴보기 싫었는데 비중이 큰 인물이라 관람이 괴로웠다.








강의사의 칼 : 품위


본인의 아픔을 개인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쓰지 않는다. 대신 '사정이 있겠죠' 하며 남을 이해하는 영역을 넓히는 데에 쓴다. 진료실에서 조각을 치료한 후 그녀의 옷 안에 있던 흉기들에 대해 캐묻지 않은 건, 그만큼 강한 사연을 감내해야 했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였다. 투우가 동물병원으로 찾아오자 본인은 사람을 볼 줄은 모른다고 하지만 그는 그렇게 조각의 상처를 꿰매고 봐 주었다.



초반에 나왔던 김무열과 다른 점이다. 둘 다 조각의 아픔을 봐준 것은 맞지만 강봉회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수의사. 메스를 쓸 줄 알고 약물을 주입하는 방법을 안다. 김무열이 칼과 총을 쓸 줄 알았던 것처럼.

수술실에서 아내를 사고로 죽게 한 병원 관계자들 등을 어떻게 찾아 죽일지 고민하지 않는다. 몰라서 안 했을까? 그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세상에 분노할 이유도 충분했고, 그걸 휘두를 방법도 알았다. 대신 공원에서 마주친 조각에게 당시의 일을 말하며 '혀 깨물고 죽을까 생각했어요' 한다.



그의 조용한 분노는 죽은 아내를 살려내지도, 그 병원을 전복시켜 주책임자를 시해하지도 못했다. 그는 야간에 근무하고 주간에는 1인 시위를 하는 방식으로 남은 삶을 산다. 사연의 강도에 비하면 지루할 정도로 평화롭다.

슬픔이 있지만 감정에 저당잡히지 않았고 힘을 남용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도 누군가를 살리고 있을 것이다. 잠식되지 않은 채로. 더 망가지더라도 그는 믿음을, 남을 향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지낼 것이다.


낯선 이가 흉기를 품고 자신을 뒤쫓은 그 골목에서는 뭐라고 불러드리면 되냐는 질문을 하고, 각 때문에 죽을 뻔한 딸의 재롱잔치에 그녀가 들고 온 꽃다발을 과일가게에 걸어 둔다. 선악 모두를 쥐었으나 바르고 따뜻한 것을 꺼내보이고 먼저 다가간다. 해의 틈을 열어두고 때로 넓면서.








살인청부업을 두고 자꾸 신성함을 들먹이길래 그게 영화를 관통하는 거대한 조소인 줄 알았다. 아닌 것 같았다. 방역이 어쩌니 하는 것도 속이 뒤틀렸다. 의도된 건가 싶었다. 똑같이 사람 죽이면서 사회의 바퀴벌레 같은 이들을 청소한다라.

그 사람들이 어떤 이유들로 이 사회에서의 해충이라면 본인들도 사회 안 규칙에 따라 책임을 져야 했던 게 맞았다. 뒤에 숨어서 돈 받고 피 묻힌 손으로 시체 난도질해 놓으면서 신성한 일고 청소라고? 욕심이 너무 많은 거 아냐?





영화는 시원한 영상미에 쩌는 액션과 엄청난 몰입감을 주는 음향 탓에 충분히 재밌다. 그러나 지다고는 말 못 한다. 원하는 것만 취사선택해 가져가 놓고는 그게 멋있다고 말하면 다인가. 관객이 바보도 아니고.


임산부에게 무례한 나이 든 남성, 요양원의 노인들을 학대한 후 거액을 삥땅치는 인간, 가정부에게 손을 대고 어린 아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아버지, 파견지의 여자를 강간하려 드는 외국 군인. 시대와 성별과 연령대를 넘나들어 갖다 쓸 수 있는 분노는 다 가져다 전시해 관객을 일깨워 놓고는, 여전히 '방역'이 되지 못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게으르고 엉성하다.


섹시한 척은 다 했으나 딱 거기까지다. 그러니까, 떡밥 회수를 못할 거면 적당히 뿌렸어야지. 기대를 크게 갖게 하지 않았으면 이 정도로 기만당한 기분이 들지도 않았다. 아니면, 정말 나보고 알아서 생각해 보라는 건가?







결국 그게 다 체력 쩔고 늘씬한 나이 든 여자와 새파랗게 젊은 남자의 칼싸움쇼을 위한 거였다니. 그럼 처음부터 그 얘기만 했으면 되잖아. 긴 영화가 그들의 개인사로 말미암은 살육전 또는 일방적인 치정극 비슷한 것으로 보이지 않게끔 편집으로 용을 썼으나, 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 시간이 지나면.. 모르겠다는 생각만 남는다. 그럼 그건 왜 나온거야, 하는.


그래도, 아. 재밌었지. 진짜. 야, 근데 그 장면은 왜 넣었을까. 혀로 112 누르는 거, 영화니까?

실제 경찰이 작중에서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는 다른 문제고, 등장은 시켰어야지. 이거 뭐, 판타지도 아니고. 영화를 본 관객들은 60대 살인병기는 없고 공권력과 각종 빡치는 것들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장치는 아예 무시해 버렸다. 현대를 무대로 한 판타지극같은 느낌이 들었던 게 그것 때문이었다. 어딘지 유치다는 인상도 받았거든.




그래서 나는 억지로 결론을 내본다.

극복하라고. 그 욕망을, 분노를.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까지 받은 이 작품을 이렇게밖에 볼 수 없는 나의 시선을 밟고 넘어서라고. 극복하지 못한 자에게 주어지는 삶은 없으니까. 그게 구더기 덩어리든, 잠이 올 정도로 지루한 일상이든, 어떻게든 필터를 덧씌워 내보이고 싶은 개인사든, 늘 외면하고 싶은 스스로의 일생 전체이든, 형형히 빛나는 살의든.


내 사연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뿐이다. 시야에 붙들려 있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정리해서 넘어서야 한다. 길 건너던 고등학생을 죽은 딸로 착각해 결국 조직 전체를 발각되게 만들 뻔한 택이 아빠, 조각에 대한 마음을 분간 못 해 아버지가 살해당한 이후의 인생까지도 말아먹은 투우.

투우, 투우라. 저기, 야. 그 딴 동네에 박해영이라고 있어. 시그널이라고 드라마 찍은 애. 걔도 불우해. 근데 넌 동네 건달에 살인마가 됐고 걔는 경찰이 됐어. 힘든 일이 있고 세상이 외면했고 잔뜩 분노를 품었던 건 똑같지만 결과는 그렇다고.







회상 장면에서 김무열이 조각에게 말한다. 아내와 아들을 본인이 사람을 썰어댄 방식으로 모두 잃은 그 현장에서 상복을 입고 그런다. 지켜야 할 것을 만들지 말자고.






그런데 그게 맘대로 되냐고. 조각이 강의사와 그의 딸을 지키려 했던 게 그녀의 의도였을 리가.

산다는 건, 나의 아픔과 표정에는 관심도 없는 세상에 맞서 소중한 것을 지키는 현장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문장대로라면 그렇다. 실상은 별 것도 아닌 내 마음의 잔상을 쳐다보다가도 지켜야 될 것을 끌어안고 보듬을 여력도 남겨 놔야 한다. 힘들지. 그게 쉽냐고. 그래도 둘 다 해야 한다면, 솔직해진다면? 전자는 쉽다. 후자가 어렵다. 내 힘은 한정되어 있잖아. 조절해야지.




그래서 그 아름다운 인질을 위해 공간을 비워둬야 하는 것이다. 아내를 수술대 위에서 잃고, 똑같이 칼과 약물을 다룰 줄 알면서도 고요한 방식으로 분노하고 딸을 챙기며 살아간 그 강봉회처럼. 죽은 아내의 시간은, 수술대와 그가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병원 앞과 납골당에서 멈춰 있겠지만 딸의 시간은 현재진행형이니까. 그리고 그 방식으로 그는 조각과 딸 모두를 살렸잖아. 들짐승처럼 부상당한 이를 치료했고, 할 말 없냐며 시비 털듯 찾아온 노인네에게 야위었으니 밥 챙겨드시라고 말하는 삶의 방법으로.




처참하게 여기저기에 칼이 꽂힌 시신을 이백 구는 본 후에도 기억에 남은 장면은 결국 그런 거였다. 그래서 나는 영화가 끝나고도 이걸 연우진 때문에 봤다고 쓴다.

강의사는 유일하게 진행형의 세상을 사는 사람이니까. 분노를 품고 파괴력을 갖고도 바깥으로 나가 말하고 행동하고 웃고 같이 밥을 먹고 일하고 있어서.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의 우리 모두도 사실은 그러고 있고, 그래야 하니까.





빡친다고, 화난다고 다 베어버리고 쏘지 않잖아. 못 하는 거라고? 글쎄, 하려면 할 수 있지 왜 못 하겠는가. 수의사 강봉회도 그 상영관을 나온 사람들도. 다 알면서 다른 선택을 하고 타인을 품어 왔다. 그리고, 그래서 세상은 아직 돌아가고 있잖아. 아직은 어떻게든 굴러간다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