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대
여하간 에어컨을 켜놓고는 우울해하지 않기로 했다.
원칙이다. 난 돈도 없으니까.
그래서, 소주 다섯 병 까면 니네랑 진-대 할 수 있는 거야?
난 못 마셔. 이것들아. 그만큼 마시면 화장실을 몇 번이나 가야 해. 진지한 대화. 뭔 진지한 대화. 야, 난 불안해. 항상. 너네도 그래?아니야? 흥.
"야, 니넨 듣고도 괜찮냐는 말도 없냐?"
".. 안 괜찮잖아.."
"어그래."
입사 동기들은 이제야 내 보이스피싱의 전말을 들었다. 반 년이 채 안 됐다니. 그래, 안 괜찮은 일이지. 그 때는 그날 하루의 일을 다 말하는 데 몇 시간은 썼어야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5분컷이었다.
"그래서 내 사이비 얘기 했잖아."
"아니, 씨. 아, 근데 나도 사이비 얘기 많아."
"진짜 미쳤나봐."
"그, 니넨 그냥 쟤랑 살아, 소영이 받아줘. 넌 집 구하지 마."
"근데. 그게 심리검사를 해서 내가 원하는 내적 자아랑.. "
"하이씨. 얘 아직도 모른다고, 그게 사이비인지."
"눈이 돌았어. 봐봐, 얘가 사이비 아냐?"
치킨에 떡볶이. 스마일 얼굴이 있는 감자튀김. 맨날 똑같은 그 치킨집. 달링 달링 나를 어쩌고, 릴리 릴리 릴리.. 별로 옛날 노래도 아닌 것 같은데 믿기지 않게도 십몇 년이나 된 아이돌 노래를 트는 호프집. 여기서 근무한다면 안 가봤을 수가 없는 거기. 떡볶이를 마지막으로 언제 먹었더라. 맛있었다. 술 시켰어? 니 기다린다고 안 시켰는데. 마실 거야? 나랑 쟤 하나 나눠 마시고 제로콜라. 아, 장난하냐고. 너 시켜, 소주. 아, 보고. 술찌들아, 짜증나.
아니, 넌 기승전 남자야? 아, 난 결혼하고 싶다고. 남자친구도 없으면서. 아니, 만날 수가 없어. 루트가 없잖아. 하, 남자고 나발이고 내 인생 내가 감당하기도 힘들다, 씨발. 뭐, 벌써 소주 각? 시켜? 됐어, 씨. 집 가야 돼.
요새 무슨 모임 나가냐. 안 가. 진심 아무것도 없음. 같이 나가쟈, 많던데. 와인 모임 나가, 아니면 테니스 동호회, 남자 많을 거 아냐. 수영장에는 없어? 할머니들밖에 없어. 수영 개잘하는 할머니들. 나도 멋진 할모니 되고 싶어. 근데 돈벌기 시러. 야, 이따위로 일해서 멋진 할머니는 무슨. 때려쳐라.
아, 미국에서 나 안 받아준다고. 남자 만난다매. 야, 미국 가야 되는데 인생의 트루럽 만나면 어떡해? 글쎄? 결혼하고 가야지. 아, 먼저 주고 말해. 뭘 줘, 나도 없는데. 그니까, 어디서 만나냐고. 아니.. 가임기야? 뭔 남미새도 아니고.
난 하고 싶어, 남미새. 근데, 있어야 하지. 아니. 다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 안 들어온다니까. 아. 한잔해. 아씨, 얘들 콜라컵 진짜 개킹받아. 인스타 올린다? 야, 근데 걔는 집에 언제 가. 누구, 아. 9호실? 멀었지, 한참 멀었다야.
오뎅바 가쟈, 개배부르니까 어디까지 걸어가서 2차 가쟈가쟈 하던 사이에 집으로 돌아왔다. 로테이션을 떠나는 동기를 축하.. 하는 자리는 아니었고 그걸 빌미로 사진을 찍고 치킨을 먹었다. 그들은 나와 성향이 조금 다르다.
나 데이 때 잠을 못 자, 요새. 너도 그래? 어. 디질 것 같아.
그래, 여기까지는 비슷한데. 나는 환자가 어떻고 누구의 이야기가 어떻고 하는 사유로 세 시간을 방구석에 처박혀 인생 전체에 대한 우울을 뜯어먹을 때 그들은 '불면증 오져' 한 마디로 끝냈다. 나 오늘 두 시 반에 일어났다니까, 야. 그건 일어난 게 아니라 그냥 안 잔 거잖아. 그러고 일했어? 그래서 아까 사진 찍을 때 멍했잖아. 내일도 데이?
아, 근데 왜케 늙었냐. 주름 어떡해? 아니. 너 살 빠져서 그래. 아냐, 개삭았어. 어떡하지. 주원이가 갸름 주사 쩐대. 걔 그거 맞은 거래? 아니, 그냥 효과 좋다고 말만 했어.
우리는 친구가 아니다.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동료, 동기라는 표현이 더 맞다. 내가 스케줄이 안 되어 못 나간 술자리, 그들은 내가 단톡에 올린 대환장하는 표정의 클로즈업 셀카 앞에 소주잔과 감자튀김을 놔준 인증샷을 보냈다. 그 날 한 명은 세 시가 되어 병동 다른 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를 잠에서 깨운 후 길바닥에 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우리는 서로의 성격은 알았지만, 가정사나 병원 입사 이전의 인생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나이대가 비슷했고, 환경은 꽤 달랐으며, 하고 싶은 것도 그 방향도 달랐고 같은 직장에서 일했다. 똑같은 것들을 보고 지겨운 것들을 공유했으며 각자가 뚜껑 연 채 분투하는 순간들을 봤고, 퇴근길 단톡에 토로했던 것들을 목격하고 함께 욕하기도 했다. 모두 20대 후반이었고 제각기 많은 것들이 달랐다. 그래서 흥미롭기도 했다.
니 진짜 그러다 훅 간다. 아냐, 나 아기 간임. 그 때 수치 보내줬잖아. 그리고 간수치는 유전이야. 아, 시키자. 술이 있어야 돼. 모임도, 이거 재밌겠는데? 어때? 계속 사람이 바뀌는 거래. 아, 근데 내 친구가 엄청 기빨린대. 술 마신대? 있어야 돼. 아니, 술이 있으면 뭐가 달라? 있지. 진대 해야지. 진대. 뭔 진대. 속에 있는 얘기도 하고. 그런 거지.
아, 그런 거. 그럼 진로 시켜서 Y랑 진대 해. 존잼이겠다. 디질래? 진짜 개극혐이야. 개싫어.
Y는 그녀의 천적과도 같은 선임이었다. 아니, 처음 본 사람이랑 뭔 진대야, 진대는. 해야 재밌지, 하. 재미없어서 술찌들이랑 못 놀겠네. 그치. 근데 니 전남친 연락 옴? 왔지. 에바야. 다신 안 만나. 개새끼.
그들은 날 내가 빠진 그날 각자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만나면, 어쩌다 자리가 생기면 병원 이야기를 하느라 바빠 그런 개인사까지 나눌 시간이 없었다. 누구 하나는 다음날 출근이 이르거나, 너무 피곤해하거나. 아니면 나처럼 둘 다에 해결되지 못한 과제를 늘상 이고 다니는 느낌이거나. 얘들도 그럴까 궁금했다.
끝없이 스튜디오에서 서비스로 준 사진을 뽀샵했고 주름 이야기를 했고 하지도 않을 소개팅이며 모임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스튜디오 촬영 때 쓰려고 산 다이소 컨페티 풍선 총은 포토이즘에서 터뜨려야 했다. 호기롭게 반짝이를 흩날린 후 다같이 바닥을 기며 그 쪼가리를 쓸어모으는 사진. 그 정도로 갈색인 줄 몰랐던 내 머리, 동기의 엄청나게 빠글한 파마머리 뒤통수. 야, 나 화장실에서 찍은 거. 술집 화장실에 먼저 들어간 동기에게 붙어 있던 게 분명한 빨간 반짝이가 바닥 타일에 덩그러니 남은 사진. 그런 걸 보면서 계속 웃었다.
월급, 자취. 건강검진. 스케줄. 야, 거기선 교육 시켜준대? 아니. 진짜 에바지. 그냥 환자 바로 보라고 한대. 옵저 기간도 안 주고? 미친 거 아냐? 개같다, 진짜. 니넨 이거 계속 할 거냐? 할 것 같은데? 작년 언젠가는 몰라, 몰라. 때려치울듯. 근데 언제 때려쳐? 하던 동기는 딱히 부정은 안 했다. 할 줄 아는 게 없어. 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 개힘들다. 요즘 너무 힘들어. 에바야. 근데 안 관둔다고? 어떡해. 할 게 없어. 하아, 씨. 쟤 다음 나래. 언니? 응. 나 보낼 거라는데? 원티드 어디 썼어? 근데 Y는 왜 안 보내? 아니 걔 퇴사 안 한대? 안 관두지. 걔 절대 안 그만둬.
정말 즐거웠다. 상큼한 사진도 찍고. 뭐만 해도 웃고, 욕하고, 또 웃고. 그리고 불안했다. 쟤들도 불안할까. 불안이 과연 공유되는 감정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려고, 그래서 둘이 소주 다섯 병을 들이부은 후 진 - 대를 하는 걸까 궁금하긴 했다. 뭔 얘기를 할까. 불안?응. 나 존나게 불안하다. 망할.
소아과가 물경력이라 미국에서 안 받아준다는 A도, 언제 어디로 갑자기 떠나게 될지 모르는, 2천만원을 잃은 나도, 수쌤에게 밉보이고 막내인듯 막내 아닌 중간연차의 설움과 싸우는 B도, 당장 이곳에서의 마지막 근무가 한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남은 C도. 다 불안하겠지?
그들도 불안해야 한다고 끌어내리는 그런 게 아니다. 연애, 결혼, 주식, 월급. 선임. 상사. 수면시간. 다. 골라잡기만 하면 칵테일 몇 개는 나올 이 답 없는 조합들. 다들 그럴 거라는 위안이 조금은 필요했나 봐. 그런데 이게 뭐 확인한다고 사그라드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진대하면 없어지냐고. 근데 아니겠지?
그래. 불안은 내 몫이고 즐거움은 나누는 거지. 그렇기에 돈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피곤한 교대근무자인 나는, 에어컨을 켠 채로는 울적해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그냥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 말이다. 이게 이 날의 불안이었다. 아, 잘 때는 켰다, 에어컨.
잠은 잘 자야지. 안 그래도 잘 못 자는데.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