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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도 10시간전

힙해지고 싶은데요

그게 뭔지도 잘 모르긴 하지만 어쨌든..









배식차에 식판을 올려놓는 매끈한 다리. 길고 탄탄했다.

아무튼 아름다운 하체에 한 번 놀랐고, 그 부근의 한문 문신에 두 번, 허벅지 절반보다 더 올라가 있는 반바지의 길이에 세 번 놀랐다. 상체가 상당히 위에 위치한 것에 3.5번째로 놀랐고, 어깨가 생각보다 더 벌어져 있고 단단한 것에 네 번째로, 노랗게 탈색했으나 뿌리가 검게 올라온 긴 머리를 올빽으로 쓸어 올려 하나로 묶은 헤어스타일에 다섯 번, 무테안경이 얹힌 콧대와 그을린 낯빛과 입술의 피어싱에 여섯 번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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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아버지였다. 소아 병동에 입원한 환아의 아버지. 이런. 남사스럽지만 다리를 한 번 더 봤다. 구릿빛. 한문이 몇 자 적힌 종아리. 남자분이시구나. 그렇지. 아버지구나.








아버지는 스테이션에서 그 앞의 간호사에게 말했다. 우리 레지나가 어쩌고.. 실로 그의 딸의 이름은 레지나가 아니었으나 아무튼 로라나 제시카 같은 틀림없는 외국 이름이었다. 말하자면 최로즈 같은 , 그런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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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카페에서 쓴다. 어제저녁부터는 심심하면 한파에 유의하라는 문자가 왔다. 스타벅스의 문을 여는 그 순간 나는 렌즈가 얼어서 내 눈을 파고드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바람이, 공기가 얼얼했다.

몇 시간 전 퇴근길에 김레지나 따님을 두신 아버지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다. 그는 상체에 뽀글이를 걸쳤지만 하체는 여전히 허벅지 반만 한 반바지 차림이었다. 바빠서, 그의 김레지나가 어떤 병중으로 입원해 계신지 보지 못한 것이 이상하게 아쉬워졌다.


나는 상당히 바쁜 하루를 보냈다. 아. 좀 볼걸. 뭐지. 무척 궁금해졌다. 1층 로비의 모든 사람들은 어둡고 길고 두꺼운 외투를 입었고 일단 다리는 모두 가려져 있었다. 머리는 대개 외투만큼이나 어두웠다. 내가 병원을 얼마나 더 다닐지는 모르겠으나, 그 모르겠는 세월 중에도 이 정도로 힙한 사람을 이 건물에서 볼 일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스티브 잡스였나, 누군가 그랬다. 사람들은 면전에 뭔가를 들이밀어 주기 전까지 본인이 원하는 것이 지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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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친구의 티켓팅을 도와줬다. 검정치마. 그들과 그 음악에 대해 문외한이나 아무튼 힙한 사람들이고 음악인 것 같다. 힙. 힙한 것이라.. 여름에 친구와 서순라길에 갔다.

나는 그때 꽤나 여성스러워 보이는 옷차림을 했는데 그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뭐, 그럴 수 있잖아? 그런 날이었다. 친구가 웨이팅을 걸어놓은 가게의, 각양각색으로 꾸몄으나 나만큼이나 흔해빠진 스타일을 한 애처로운 젊은이들을 한 무더기 관찰했다. 있어 보이게, 여리해 보이게, 부드러워 보이게, 날씬해 보이게, 점잖아 보이게, 길어 보이게, 밝아 보이게, 잘생겨 보이게, 훈훈해 보이게.. 어쨌든 어때 보이는 것을 표방한 그 모든 옷차림과 스타일들. 번화가를 가는 것이 재미있는 이유다. 그리고 그 가게의 주인장을 보는 순간 알았다. 아, 난 저런 걸 하고 싶은 거구나. 그렇지. 바로 저거다.



굳이 말하자면 박준형 같은 스타일이었다. 키가 큰 것 같았고, 짧게 친 머리는 크레파스 세트 안의 개나리색처럼 샛노란 색으로 바짝 서 있었다. 소매를 접은 티셔츠는 꽃분홍색이었고, 시퍼런 청바지는 원투쓰리포 버블버블 하면서 발로 이불 빨래라도 하고 나온 것처럼 종아리 중간에서 대충 걷어올려져 있었다. 피부는 당연히 까무잡잡했고, 내가 인생컷 부스가 아니면 쓸 일이 없을 것 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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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문을 받아온 친구에게 물었다. 어때, 안 무서워? 아니? 엄청 친절하시던데? 왜, 무서워? 글쎄. 그렇지.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아.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 키가 큰 체격으로, 피부를 태우고, 쇠질도 좀 해서 근육도 붙이고, 치토스 봉지나 바비인형 박스 색 같은 민소매 상의를 입고 쪼리를 끌되.. 아니야. 슬리퍼는 좀 그래. 신발은 다른 것으로. 아무튼 외양을 봤을 뿐인데 '저렇게' 사는 것에 대해 내내 상상했다. 단단한 몸, 단단한 피부, 단단한 정신력, 예민하지 않은 성질, 누가 뭐라든 개의치 않는 성정. 언제나 즐겁게, 무엇이든 별 것 아닌 것으로 툭툭 넘기고 와하하 하고 웃을 것 같은 뭐 그런 인간.












나는 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귀엽고 예쁜 게 좋았고, 좋다. 키링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이 대유행해 좋은 점은 작고 귀여운 인형들을 어디서나 팔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고 그게 누구든 항상 좋아하는 연예인 두셋쯤은 있었다. 하얗고, 마르고, 길고.. 뭐 그런 스타일들. 그런데 그날 다른 차원의 이상형도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아니. 자아를 하나 더 가질 수 있다면 저런 사람으로 나고 싶다고 열심히 생각했다. 깊게 담아 두지 않고 항상 햇살 내리쬐는 해변에서 발을 꼰 채 손베개를 하고 누워 있을 것 같은 그런 한량. 어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거리낄 것도 없는 편안하고 밝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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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너무 바쁘다. 나는 거친 종잇장처럼 일한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사방에서 울려 대는 알람이며 벨소리를 듣고 그걸 처리하고 내 앞, 옆, 뒤, 또, 앞, 그보다 살짝 옆 아무튼 온갖 방향에서 떨어지는 중요하고 안 중요한 일들을 안내하고 소리 지르고 양해를 구하고 감사를 표하고 또 양해를 구하고 가끔은 어르고 달래느라 엄청나게 파닥댄다. 어떤 일, 어떤 상황이든 좀 조용히 넘기고 침착하게 대하고 싶다. 그런데 잘 안 된다. 나는 그게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일해온 세월 내내 알았다. 애석하게도 그렇다. 정말로 애석한 일이다. 나는 성질이 급하고 표정을 감추기 위해 배는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공휴일, 계절, 시국, 나의 건강 상태 등등 그 어느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고려해 주지 않고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이 근무 환경은 나의 그런 성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 딱 좋다.












그래도 해가 넘어갔으니 결심 아닌 결심도 하지 않겠는가. 되든 안 되든. 나는 오늘도, 어떻게든 될 테니 허둥대지 말고 급하게 굴지 말자고 생각했다. 하나씩, 하나씩 하자고. 그래서 된 게 이 정도였다. 바빴다. 바빴고, 수액 껍데기가 든 쓰레기통을 대충 뒤집어서 일부러 쾅쾅 털어 버리고 싶을 만큼 짜증이 났다.




짜증? 이걸 짜증이라고 해야 해? 짜증 아니다. 부아가 치밀었다. 정말 부서져라 그 쓰레기통을 비우고 트레이들을 박박 닦았다. 삶은 언제 어디서든 오류를 교정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핏자국을 닦고, 안 되면 되게 하고, 울면, 그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윽박질러서라도 참게 하고, 더러워진 것들을 씻고, 달랑거리는 것을 다시 붙이고, 전화를 걸어 공손한 목소리와 말투로 닦달하고, 뭔가 오면 잽싸게 뛰어가 접수시키고, 울리면 가서 원인을 바로잡아 끄고,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면 말을 걸어 이유를 말하게 하고 문제든 요구든 해결하고 들어줘야 다. 예민한 만큼 그런 소리와 잘못된 것들을 오래 놔둘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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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 시까지 피를 뽑아 접수하지 않으면 보험 처리가 하나도 안 되는 약을 맞아야 하는 친구가 있었다. 고작 15kg짜리 소녀였다. 주사처치팀 선생님들은 말 그대로 빽빽 우는 그 요정같이 마른 아이를 달랬다. 나는 이제 그럴 수 없었다. 나를 이기고 싶으면 몸무게를 서너 배는 더 키우고 이십 년은 더 밥을 먹고 와야 했다. 울어도 할 거라고 소리치고 팔을 붙들었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울부짖는 소리에 검체통에 피가 얼마나 담겨야 한다는 내 말 30cm 앞의 정맥주사팀 선생님께도 안 들렸다. 나는 8살짜리 여자애를 상대로 최선을 다했다. 주사를 하고도 이십 분을 더 '아픈데도 했자나! 내 말 안 들었자나! 아프댔자나!' 라며 병동이 떠나가라 울던 애가 잠들고, 검체가 천만 다행히도 무사히 접수된 후, 나는 투약할 것을 가지고 가서 어머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어머니는 역시나, 천만 다행히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었다. 정말로.










아무튼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당장 오늘도 그렇게 우악스럽게 일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낮은 목소리와 떡 벌어진 어깨와 구릿빛 피부와 가득 찬 알통으로 모두를 위협하지만 사실은 허허 내 웃기만 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난리 치지 않아도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여유롭고 유쾌한 사람이고 싶다. 노력은 하겠지만 이제 키는 더 클 일이 없고.. 타고난 체격은 노력해 봐야 거기서 뭘 더 어떻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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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서 한 번씩 했던 생각은 하나였다. 나는 오늘 반드시 미피 도시락통을 사러 갈 거라고. 병동의 스트레스와 이 당 덩어리 간식들이 내 정신과 건강과 기분 상태 모두를 망치게 할 수 없었다. 매번 고구마며 샐러드를 싸 가지고 다니는 동료처럼 나도 차라리 뭘 가지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내일은 그 귀여운 통에 프로틴케익이나 구운 닭가슴살을 넣어서 출근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엘리베이터에서 힙에 대해 생각했다.











힙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젤라틴을 너무 많이 넣어서 개복치마냥 흔들리는 푸딩은 힙하지 않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미칠 듯한 분노와 짜증과 억하심정을 느끼며 흔들리는 나는 힙하지 않다. 힙은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쪼대로 사는 것이다. 구릿빛 피부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고 따로 놀던 꽃분홍색 티를 입은 그 사람처럼. 조화라고는 찾을 수 없는 외양을 한 김레지나의 아버지처럼.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않고 내 선에서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무례하게 굴어도 눈을 흘기지 않고, 안 풀리는 상황이 닥쳐도 한숨을 쉬지 않는다. 밀려왔다가 떠나가는 파도를 드러누워 바라보는 가상의 '힙'한 비치 보이처럼, '그러라 그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다. 사실은 생각조차 하지 않아야 하는 건데. 그것까지는 안 되니까. 흔들리지 않고, 우직하게 그 자리를 구릿빛 몸으로 지키고 서서 강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사람이고 싶다. 안 어울리면 어떤가. 힙한 인간은, 흔들리지 않고 알아서 잘 사는 인간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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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힙과 미피 도시락과 한자 문신과 입술 피어싱.. 뭐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상관이냐고? 잘 모르겠다.

아무튼 목표 아닌 목표다. 비록 당장 머리를 반삭으로 밀고 누렇게 탈색할 수는 없지만, 유니폼 대신 다 찢어진 넝마 같은 티셔츠를 입고서 미소만 띄우고 병동의 모든 소음들을 무시하며 온화하게 앉아 있을 수도 없지만.. 속으로 힙해지겠다는 마음이다. 이 내가 떨어진 이런 환경. 나는 나조차도 거슬러 허허 웃는 인간이 될 것이다.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 망할 많은 것들과 더 짜치는 나 자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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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쓸데없는 것들이다.

이런 쓸데없고 귀여운 것들과 딱히 쓸데없지만 벅차오르는 결심들이 그렇다. 근데 어떡해. 뭘 해도 똑같은 인생 매일매일 조금이라도 새롭게 사는 이런 시도, 나중에 돌아보면 다 귀엽고 재밌는 기억이다.


그럼 그때의 내 해변에 누워 햇빛에 피부가 타든 안 타든 개의치 않으며 그 시간들을 떠올려 보고 있겠지. 참, 귀엽고, 기특한 시도들이었다, 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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