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도시 매거진 | 스페셜 리포트_홋카이도 (5)
날씨는 춥죠. 눈보라는 치죠. 고작 오후 4시인데 해는 이미 넘어가고 사방이 깜깜합니다.
삿포로 외곽의 한적한 길을 헤매고 있는 차에 멀리 노란 불빛을 켜둔 건물이 보였습니다. 발길이 그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커피와 맥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은은한 음악이 유리문을 넘어 눈보라 치는 거리로 새어 나옵니다.
삿포로 도심에서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이곳은 기쿠스이 菊水라는 동네입니다. 도심의 오도리 공원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화려한 불빛과 사람으로 가득하지만, 기쿠스이는 그저 한적할 뿐입니다. 지하철 역에서 나온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추위를 피해 집으로 향합니다. 사거리 코너의 오래된 이자카야 하나가 연기를 피우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듯반듯 줄맞춰 들어선 주택과 그럭저럭 먹을 만한 동네 식당이 몇 개 있는, 밤이 빨리 찾아오는 전형적인 도시 변두리입니다. 이런 곳에서 커피, 맥주, 은은한 음악이 있는 근사한 공간을 만났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이곳은 <호텔 포트멈 스테이 & 커피 Hotel Potmum Stay & Coffee>입니다. '호텔인데, 머물고 커피 드세요'라는 긴 이름의 호텔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호텔의 1층입니다. 로비, 프런트, 라운지가 있어야 할 호텔의 1층 대부분을 카페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카페는 홋카이도 커피의 리더, <모리히코>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모리히코의 이야기는 지난 회에서 다루었는데요, 홋카이도를 기반으로 로스팅 카페를 운영하는 지역 대표 선수입니다.
호텔의 숙박객과 일부러 카페를 찾아온 손님들이 커다란 통나무 테이블에 섞여 앉아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홋카이도의 좋은 공간에는 어김없이 벽난로가 있습니다. 장작불의 향기가 공간에 퍼지고 사람들이 화로 앞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라운지체어에 앉아 내부를 둘러봤습니다. 천장이 훌쩍 높아서 공간이 시원시원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닥과 벽의 일부분은 오래된 마감재료를 떼어내고 건물의 뼈대를 그대로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 다른 용도로 쓰던 건물을 개조해서 카페와 호텔로 꾸민 듯합니다.
카페 한편에 조그만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호텔 프론트 데스크를 찾아 갔습니다. 여기서 호텔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후지이 빌딩>의 이케다 씨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기는 어떤 곳인가요?
"부동산 회사인 후지이 빌딩과 모리히코 카페의 '콜라보'로 만든 호텔 겸 카페입니다."
후지이 빌딩은 주거, 업무 시설 등 홋카이도에 70여 채의 부동산을 소유한 지역의 강자라고 합니다. 1960년대 부동산 사업을 시작해서 3대에 걸쳐 성공적으로 회사를 운영했는데요. 이런 회사가, 지역 커피의 맹주인 모리히코 커피와 협력해서 만든 호텔이 바로 이곳, 호텔 포트멈 스테이 & 커피입니다.
"원래 후지이 빌딩이 사업 초기에 사들여서 오랫동안 관리해온 오피스 건물입니다." 이케다 씨가 말을 이었습니다.
"개조를 거쳐 호텔로 만들었는데, 모리히코는 1층의 공간과 운영을 담당하고 우리는 상층부의 객실을 디자인했습니다."
두 회사의 협력을 통해 오피스의 로비 공간은 카페로, 사무실 층은 호텔 객실로 바뀌었습니다. 사무실 구조를 있는 그대로 살린 덕분에, 천장이 높고 시원시원한 공간을 가진 호텔이 탄생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오피스를 개조해서 호텔을 만들고 로비 한켠을 유명 카페나 레스토랑에 임대주는 방식이야, 이미 많은 사례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케다 씨가 '콜라보'라는 부분을 강조한 이유를 들어보니, 단순히 객실과 식음료 공간의 설계를 두 회사가 나누어 맡았다는 것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습니다. 즉, 호텔의 초기 기획 단계부터 부동산과 커피가 만나 '여행의 시작은 커피로부터'라는 컨셉트를 세우고 공간을 만들다고 합니다. 호텔 포트멈은 지역 부동산의 강자 후지이와 지역 커피의 맹주 모리히코의 합작품인 셈입니다.
모리히코는 지난번에 살펴봤으니, 후지이 빌딩을 알아보죠.
지역 부동산의 강자 후지이와
지역 커피의 맹주 모리히코의 합작 호텔
삿포로 시내 전역에 패밀리 타입과 싱글을 위한 3,000 개의 물건!
임대 아파트는 후지이 빌딩에 맡겨 주십시오.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이런 멋진 호텔을 운영하는 회사 치고는 어울리지 않게 소박한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사실 후지이 빌딩은 지역의 건물을 매입하고 개조해서 임대하는 평범한 부동산 회사입니다. 1960년대, 삿포로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하는데요. 그 시기 주택난을 틈타 생겨난 임대 전문 회사입니다. 그로부터 50년 후 인구 절벽 시대가 된 지금도 회사의 주 업무는 아파트 임대이고요. 그런 회사가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해 처음으로 손을 댄 사업이 호텔 포트멈이고, 그 프로젝트를 위해 택한 파트너가 바로 커피 회사 모리히코였습니다.
호텔 포트멈에서 모리히코는 커피뿐 아니라, 홋카이도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내놓고, 지역의 크래프트 비어를 대접합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축적해 온 브랜드의 힘과 운영 노하우를 호텔 1층으로 옮겨와서 호텔을 순식간에 삿포로의 '핫한' 장소로 올려놓았습니다. 만약 평범한 부동산 임대 회사가 후미진 동네에 비어있는 사무실을 혼자서 개조했다면 어땠을까요? 이렇게 흡입력을 가진 장소가 생기기 어려웠을 겁니다. 부동산 회사가 가지기 힘든 귀중한 열쇠를, 모리히코가 내놓은 셈입니다.
모리히코 입장에서는 호텔 손님들이 늘 스쳐가는 1층을 크게 차지하고 꾸준히 고객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호텔은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에 유동 인구가 한 점에 집중되는데요. 이는 카페 운영 측면에서 펄쩍 뛰며 반길 일입니다. 아침과 밤은 일반적으로 카페에 손님이 없는 시간대이기 때문이죠.
홋카이도에 찾아온 여행객에게 자신의 브랜드를 쉽게 알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미래의 모리히코 팬들을 모으는 홍보효과 말입니다. 카페만 달랑 있었다면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어려웠을 한적한 동네에, 호텔과 함께 들어가면서 꾸준히 사람들이 오가는 공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부동산과 커피의 콜라보. 한적한 변두리를 활기로 채운 근사한 한 수였습니다.
부동산과 커피의 콜라보.
한적한 변두리를 활기로 채운 근사한 한 수
모리히코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야겠습니다.
"Coffee & Something." 모리히코가 내세우는 슬로건입니다. 커피와 무언가를 결합하겠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모리히코가 운영하는 홋카이도의 9개 지점들은 전부 '커피와 뭔가의 결합'이라는 컨셉트로 만들어졌습니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모리히코 플랜테이션>은 로스터리와 장터를 결합했고, 마루야마 공원 인근의 <마리 피에르>는 커피와 프랑스 전통과자의 결합을 내세웁니다. <JB ESPRESSO MORIHICO. + D>는 커피와 홋카이도 유제품의 결합입니다.
정리해보면, 이 커피 회사는 모리히코라는 패밀리 네임 아래, 커피와 어울리는 '뭔가'의 요소를 결합해서 점포를 확장해 가고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뭔가'의 결합을 통해 각 점포들은 차별화된 개성을 가지게 되고요.
생각해보면, 커피는 뭔가와 쉽게 결합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그 맛이 음식과 잘 어울립니다. 커피의 쌉쌀하고 새콤하면서도 풍미가 살짝 도는 그 맛. 그 맛을 초콜릿 케이크에 더하면 행복한 조합이 탄생합니다. 부드럽고 고소한 아메리카노는 샌드위치나 토스트 같은 식사빵과 잘 어울립니다. 토마토 파스타에도 좋고, 떡이나 한과 같은 전통 간식과도 어울려버리니, 정말 누구나의 친구입니다.
"커피 앤 썸띵"
무언가와 잘 결합하는 커피의 힘
단순히 커피+음식의 조합뿐 아니라, 커피는 컨텐츠와의 결합력도 좋습니다. 혼자서 조용히 마시는 에스프레소는 음악 감상과 잘 어울립니다. 독서와 함께 마시는 라떼, 근사하죠. 누군가와 함께 하는 일에도 커피는 어울립니다. 사무실, 호텔, 공연장에 커피가 들어가면 금세 분위기는 온화해지고 사람들은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커피 한잔 하죠"는 만나서 좋은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과 동의어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냥 "이야기 좀 할까"는 뭔가 심각한 일이 발생했다는 뜻이고요.)
뿐만 아닙니다. 결합이라는 키워드를 두고 생각해보면, 이제 커피는 우리의 도시 무대에 수시로 끼어드는 중요한 조연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책방을 열든, 백화점을 만들든, 마을 회관을 계획하든, 병원을 짓든, 그 공간 안에 캐스팅하고 싶은 첫 번째 조연 배우는 커피입니다. 커피가 들어서는 순간, 주인공인 책, 상점, 병원의 연기가 더욱 빛나게 됩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도시의 상업 공간, 문화 공간, 커뮤니티 공간들이 모두 카페화 되어가고 있다, 이런 결론을 낼 수도 있을 겁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다른 사람과의 교류도 가능한 도시 공간이 어디냐,라고 물었을 때, 카페 외에는 별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장소가 없습니다. 그리스의 아고라, 로마의 나보나 광장, 하동의 화개 장터가 하던 역할을 이제는 카페가 넘겨받은 것입니다.
커피는 국제 공용 코드이기도 합니다. 검은콩을 가루로 빻아 뜨겁게 우려낸 액체를 마신다는 개념은 (약간의 형태 변화는 있을지언정) 지역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 지구촌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잠비아 친구랑 이질감 없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나요? 1년에 1인당 300잔의 커피를 마신다는 우리 국민 여러분, 당신이 1년에 쌀밥을 몇 공기 먹는지 잘 생각해보시면 커피가 주식主食에 근접하고 있다고 주장해도 그리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커피는 우리의 주식이자 세계인의 주식입니다. 생면부지의 외국인을 만나더라도 좋은 커피를 들이밀면 상대가 고개를 끄덕여준다는 겁니다. 커피는 국제적인 결합력을 갖추고 있는 아이템입니다.
초콜릿 케이크, 독서, 마을회관, 잠비아 친구와 어울릴 수 있는 커피의 미덕. 이런 커피의 강력한 결합력을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커피를 중심으로 부동산, 호텔, 상업, 건축업 같은 온갖 종류의 사업을 붙여나갈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당신이 어떤 전투에 임하든 머릿속에 한 번쯤 떠오르는 이 시대의 최종병기, 커피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커피의 결합력을 잘 이해한 후지이는 모리히코를 초대해서 쇠락한 동네의 오피스를 호텔로 개조했습니다. 초대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츠타야 서점>은 스타벅스와 단짝으로 다니며 매장을 열어 왔는데요, 홋카이도에서만큼은 지역의 터줏대감, 모리히코를 불러들여서 삿포로 외곽의 창고형 서점을 오픈했습니다.
부동산 회사와 대규모 유통 회사가 커피에 고개를 숙이는 세상. 모리히코가 내세운 "커피 앤 썸띵"은 커피의 결합력을 꿰뚫어 본 궁극의 선언이었습니다.
매력도시연구소가 커피를 주목하는 이유, 또 있습니다.
커피는 도시 공간과의 궁합도 발군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간이든 커피가 들어가면 분위기가 좋아집니다. 어둑한 뒷골목도, 시골의 오래된 방앗간도, 버려진 공장도, 주택의 반지하도 일단 커피와 결합하면 공간이 부드럽게 바뀌고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아니, 오히려 허름할수록, 오래될수록, 무언가 부족한 공간일수록 커피는 슬그머니 그곳과 의기투합해서 장소의 매력을 드러내줍니다.
지나가기 조차 겁나던 침침한 골목에 좋은 카페가 생기면 그 한 점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활기가 퍼져나갑니다. 매력도시연구소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력적인 도시 공간의 발아점, 이게 커피입니다. 매력을 차지하고 싶은 지방 소도시가 당연히 탐내야 할 장점이기도 하고요.
커피와 도시 공간의 궁합
포트멈 호텔이야기를 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질 좋은 공간과 철학이 있는 컨텐츠. 우리가 생각하는 매력도시의 필요조건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 조건이 성립해야 매력 사람들이 모이고 지역에 활기가 생길 테니까요. 호텔 포트멈 스테이 앤 커피는 공간을 가진 자의 대표인 부동산 회사, 그리고 이 시대 가장 결합력이 좋은 컨텐츠를 가진 커피 회사의 합작품입니다.
도시의 변두리. 해가 지면 재빨리 집으로 숨어드는 전형적인 베드타운 bed town. 사람들 사이의 교류가 생기기 쉽지 않은 춥고 긴 겨울. 이 모든 악조건 속에서 후지이와 모리히코는 눈보라 치는 삿포로의 밤에 좋은 커피와 음악을 더했습니다.
자, 부동산 여러분, 카페 여러분. 함께 커피 한잔 하세요. [매력도시연구소]
매력도시 매거진 스페셜 리포트_홋카이도
2편: 후라노의 눈 밭에서 달콤한 푸딩을: 아무푸린 제조소
4편: 홋카이도에도 근사한 커피 로스터가 있다구요: 모리히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