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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험가 May 28. 2020

넘버 투

죽은 나의 개를 기억하는 방법 #4


  나는 강아지다.

  인간들이 귀여워해 마지않는 코카 스패니얼 강아지다.


  5개월쯤 살아왔다. 

  사람 나이로는 3살쯤으로 세상을 알아가는 시기이다.     

  지난 세월 쉽지 않게 살아왔다.     


  엄마. 엄마의 젖 냄새를 맡고 싶은데 기억이 안 난다. 아마 젖도 많이 물어보지 못한 것 같다. 형제들이 많았던 게 기억나고 옆방에도 친구들이 많았었다. 그때가 좋았는데. 똥을 싸면 엄마가 궁둥이를 핥아 주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다만 바닥이 떠 있어서 엄마 품을 벗어나면 위험했던 기억만 남아있다. 

  엄마는 항상 얘기했다.      


  발 조심해야 한단다. 아가야. 바닥을 잘못 밟아 다치게 되면 좋은 곳에 못 간단다.      


  좋은 곳? 좋은 곳이 어디지? 어디로 간다는 말이지? 


  얼마 후 진짜로 어디론가 갔다. 옆방 아이들과 우리 형제들이 좁은 방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엄마와 떨어져 불안했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어 즐거웠다. 다만 바닥이 무서웠다. 나는 엄마의 말대로 발 조심을 철저히 했다. 하지만 몇몇 친구들은 그 바닥에 발이 끼어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검은 손이 어디론가 데려갔다. 


  좋은 곳에 가야 할 텐데.     


  그 검은손은 무서웠다. 밥도 주고 물도 주었지만, 항상 화난 얼굴과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엄마의 따듯한 품과 목소리가 그리웠다. 하나둘 형제와 친구들이 어디론가 떠나가며 나의 불안감도 커졌는데 그 검은 손이 나를 또 꺼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좋은 곳일까?    

 

  어떤 누나가 혼자 사는 좁은 집이었다. 좋은 향기가 많이 나는 그녀는 나를 물고 빨고, 물고 빨고 했다. 그러나 아침에는 어디론가 가서는 밤늦게나 들어왔다. 낯선 집에 혼자 있기 무섭고 외롭고 그래서 울다 자다, 울다 자다 했다. 물론 궁금해서 집안 이리저리 탐험하기도 했다. 좋은 냄새 나는 것들이 많아서 신기했다. 혼자였지만 집안 구석 이리 저리에 재미있는 것이 많아서 지낼 만했다.     


  집에 돌아온 누나는 반가운지 날카로운 소리를 질러댔다. 혼자 뭐라 뭐라 하며 좁은 집 이곳저곳을 부산하게 다니며 뭔가도 했다. 나도 덩달아 신나서 이리저리 요란하게 엉덩이를 흔들어 댔다. 누나의 목소리가 더 올라갔다. 나는 더 신났다.      


  철이 든 요즘에야 청소라는 걸 알게 되었고, 눈치가 오른 요즘에야 그 목소리가 화난 거란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 뒤 누나가 나에게 옷을 입히고 목줄을 채우더니 밖으로 데려나갔다. 그것이 나의 첫 외출이라 무척 흥분되었고 누나에게 잘했다고 칭찬을 하기 위해 엉덩이를 신나게 흔들며 뛰며 걸으며 했다. 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크게 웃고 떠들며 첫 산책을 즐겼다.     


  그 날 누나는 나를 다른 집으로 데려갔다. 그 집 가족들은 처음 만난 나를 무척 예뻐했다. 새로운 손길에 흥분하여 놀다 보니 누나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을까? 혼자 가버린 누나가 언제 올지 기다려졌다. 그런데 오지 않았다.     


  이 집에도 누나가 있었고 다른 아이와 아줌마, 아저씨가 있었다. 그 누나는 나를 항상 옆에 데리고 있었다. 좋았던 것은 나를 처음으로 ‘비니’라고 불러준 것이다. 그 목소리와 어감이 좋아 부를 때마다 엉덩이를 흔들며 누나에게 다가갔다. 이 가족들은 대체로 나를 귀여워했지만, 저녁에 아저씨가 들어오면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저씨는 나를 보며 무슨 큰소리를 내면서 가족에게 뭐라 뭐라 하곤 했다. 그러면 누나는 나를 구석방으로 데려갔다. 문틈으로 맛난 냄새가 들어오고 재미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밖에서 놀고 싶은데.    

 

  그러던 어느 날 누나는 산책 채비를 하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외출이다. 최대한 즐거워 보이려고 엉덩이를 좌우로 크게 흔들며 걸었다. 그래야 다음에 또 산책하러 나갈 거니까.     


  간혹 가던 공원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났다. 가족으로 보이는 세 명이다. 내게 인사를 하기에 최대한 예쁜 척을 했다. 나 잘했지? 라며 누나에게 자랑하려고 돌아보니 저만치 가고 있었다. 


  어! 누나!

  목에 맨 줄이 팽팽해지도록 쳐다봤다. 목이 아파져 왔다. 

  느낌이 이상하다. 가슴도 아프다.     


  그 가족이 나를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갔다. 마음이 상해 그들의 무릎을 거부하고 바닥에 앉았다. 가슴이 이상하다. 메스꺼워진다. 어지러워 꼬마의 발에 기대니 무릎에 올려줬다.    

  

  나 또 어디로 가는 걸까? 

  머리가 어지러운지 마음이 어지러운지 모르겠다.     


  내가 세 번째로 살게 된 집은 세 사람이 살고 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꼬마.     


  이들은 내게 헌신적이다. 하긴, 내가 좀 치명적이긴 하지. 내가 5개월이나 험난한 세월을 살았기에 이 세상은 질서에 의해 굴러간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이 집에도 서열이 있었지만, 내가 왔기에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정해 보려 한다.    

 

  먼저, 누가 봐도 확실한 막내와 넘버 원을 정해 보자.   

  

  막내는 꼬마다. 누가 봐도 조그만 몸집에 엄마와 아빠에게 복종하는 모습이다. 밥 먹을 때도 가장 나중에 먹기 시작하고, 인사를 할 때도 가장 먼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면 서열이 많이 밀리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꼬마는 내 똥을 치운다. 그러니 누가 봐도 이 집의 서열 꼴찌가 분명하다. 내가 챙겨줘야 할 막내다.  

   

  그리고 이 집의 우두머리는 엄마가 확실하다. 목소리 크기와 다른 가족들의 복종 여부를 봐도 그렇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먹이를 챙겨 준다는 거. 엄마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양손 가득히 무언가를 가져온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온 집에 맛있는 냄새가 진동한다. 그리고는 가족들을 큰 소리로 불러 모아 먹게 한다. 이것이 우두머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다만 그 냄새 나는 것을 나에게는 안 주고 다른 것들을 챙겨 준다. 어쨌든 먹을 것을 주는 엄마가 이 집의 최고 우두머리다. 첫날 밤 나를 재울 때도 오래전 엄마 젖 냄새를 맡은 기분이었다.     


  그다음 서열은 아빠인데 좀 애매하다. 우선, 집에 오래 머물지를 않는다. 아침에 나가면 밤에나 들어온다. 심지어는 며칠 만에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그렇다고 먹을 것을 구해 오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엄마가 큰소리치지. 그나마 들어오면 엄마가 쥐여주는 봉지를 들고 다시 나갔다 온다. 심부름꾼인가? 어떤 날은 나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서 시중을 들어준다. 그래서 아빠를 좋아해 주려고. 그런데 서열은? 꼬마보다는 위이고, 엄마는 부동의 우두머리고, 그럼 나와 아빠는? 아 모르겠다. 그냥 내가 넘버 투다.    

 

  내가 정리한 이 집의 서열은 다음과 같다.     


  부동의 우두머리는 엄마. 내게 밥을 준다.

  누가 봐도 막내는 꼬마. 내 똥을 치운다.

  애매하지만 세 번째는 아빠. 나를 산책 시킨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나다. 설명이 필요한가?     


  각자의 위치에서 내게 헌신을 하는 이 가족들이 좋아진다. 비니! 라고 불러주는 다양한 높이의 목소리들이 정겹다. 이제 엄마의 젖 냄새도 가물가물하다. 나의 무리를 이룰 때가 된 것이다.     

 그래. 이 집에 살아주자.

 이 집에서 살아줄게.      




16세기 조선의 '이암'이 그린 모견도(母犬圖)이다.

나무 그늘 아래 어미 개와 강아지가 정겨워 보인다.


새끼를 바라보는 어미의 시선이

어미의 몸 위에서 쉬고 있는 강아지의 모습이

세상의 그 어떤 모습 보다 행복해 보인다.


비니도 저런 강아지 시절이 있었을 텐데.


여러 집을 전전하다 우리 집에 온 녀석은 적응이 빨랐다.

그런 모습이 내게는 눈치 빠른 것으로 보였고 그래서 측은하기도 했다.

비니는 우리 집에서 산 16년 견생이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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