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잔잔히 한 쪽 눈부터 떠진 나는 커튼을 치고 눈부신 햇빛에 눈 비비며 어젯밤 행복하게 나눈 사랑을 살짝 떠올려본다. 이내 미소를 짓고 옆에 누워있던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미소 지은 채 잠들은 모양이다.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조심스레 그녀를 깨워본다. 깊이 잠들었는지 잠귀에 밝던 그녀가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리고 어디가 아픈것일까 유난히 그녀의 몸이 차갑다.
그리고 문득 화사하던 세상이 순간적으로 잿빛 세상으로 바뀜과 동시에 난 자동반사적으로 나의 귀를 그녀의 코에 갖다대었다.
나는 남들과 다르게 특이한 피부색과, 어릴 때부터 종교를 가지게 될 수 밖에 없는 곳에서 자랐다. 하지만 난 불평하지 않았다. 난 남들과 다르게 세상을 밝게 보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이사를 정말 많이 다녔다. 영문도 모른채, 아버지에게 이끌려 우리 가족은 거의 도망가다시피 지내야했다. 왜 그러는지 어린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묵묵히 아버지를 따르며 우리 9남매를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쳐 뒷바라지 하셨다. 생선가게, 야채가게 등 안해본 장사가 없었다. 나는 이러한 이동하는 삶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를 가다가 눈에 띄는 오래된 낡은 건물을 보게 되었다. 마침 아버지가 잠시 쉬었다 가자 하셔서, 나는 호기심에 가득 찬 상태로 그 건물에 홀로 다가갔다. '지바센 예술학교'라는 문구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찰나의 경험과 순간의 이미지가 나의 남은 평생을 예술가로 살게 만들 줄은 이 때 당시에는 몰랐다.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고 30분즈음 지났을까, 아버지가 통행관과 시비가 붙으셨다. 아버지의 안색은 점점 짙어졌다. 그리고 결국 긴 한숨을 쉬시고는 아까 그 예술학교가 있던 마을로 돌아가자고 하셨다. 나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 한켠은 왠지 모르게 설레었다. 사실 아까 그 학교에 다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버지가 이 곳에 정착하여 집을 구하셨고, 나의 또 다른 삶이 이 곳을 통해 시작되었다.
이 마을을 묘사하자면 말 그대로 '자연'과 동화된 친환경 마을이었다. 자연 속에 어울리지 않는 인위적인 건물들이 들어선 것이 아닌, 마치 원래부터 한 몸인것처럼 낡은 건물들이 하나의 숲 속 생명체처럼 고적의 분위기를 풍기며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이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수업 점심시간마다 이 숲 속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 우리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곤 했다. 그렇게 내려다보고 있으면 자세히 그 감정을 묘사할 순 없지만 그냥 좋았다. 그리고 이는 내가 학교를 가는 즐거움이자 나만의 루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처음으로 더 이상 이사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애착감이 마음 속 깊이 뿌리내렸다.
또 다시 마주한 평화로운 점심시간, 오후 수업 시작종이 울린 것도 모르고 깜박하고 잠이 들었다. 나는 급하게 언덕을 내려가 조용히 몰래 교실에 들어갔다. 이번 수업은 '가르도바' 선생님의 미술시간. 난 가르도바 선생님의 수업이 특히 좋았다. 왜냐하면 다른 선생님들과 다르게, 내가 창 밖의 자연을 보는 데 단 한번도 쓴 소리를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님의 미술시간은 전형적인 교과서 내용을 다루긴 했지만, 표현하는 데 있어서 한계를 두시지 않았다. 즉 나만의 그림을 가르도바 선생님은 독특하고 상상력이 좋다며 오히려 칭찬해주신 유일한 선생님이셨다. 덕분에 비현실적인 나의 그림에 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선생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 그림을 더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종종 난 가르도바 선생님의 일상이 궁금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에게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은 가르도바 선생님이 무용도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점점 더 선생님이 좋아졌다. 특히 선생님의 무용이 너무 궁금했다. 그리고 내게 이르기를, 무용과 미술은 예술 차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알려주셨다. 무용에서의 추상적 표현과 완곡함이 미술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고, 미술의 추상적 표현과 완곡함이 무용에서도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 난 당연히 무슨 말인지 당시에는 이해할 순 없었다. 손으로 그리는 예술과,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이 같은거라고?! 이러한 의문을 남겼던 선생님의 말은, 나중에 내가 파리에서 성공한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지바센 예술학교 졸업을 앞두고 나는 동기생 친구의 집을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린 서로의 꿈을 나누며 앞으로 졸업 후에 어떤 진로를 향해 갈 것인지 대화를 나누며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여기서 한 잔, 저기서 한 잔, 어른 흉내내며 샴페인과 와인을 번갈아 마시다보니 난 점점 강하게 몰려오는 취기에 열이 올라와 쉬려고 잠시 거실 소파에 않았다. 그리고 그 때 파티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왔는데, 그곳에서 난 나의 운명 '벨라'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