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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당한 박선생 Oct 25. 2020

벌레를 잘 잡는 여자

너를 기억하는 일기

"벌레 잡을 수 있나요?"

"..네"


말보단 행동이다. 원장님의 물음에 대답함과 동시에 난 벽에 기어 다니는 벌레를 재빠르게 잡았다. 아침 회의를 마치고 원장님과 함께 치료실로 돌아온 참이었다. 치료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분의 안부를 묻던 중에 발견된 벌레. 원장님의 오른발이 앞으로 움직였지만 내가 더 빨랐다. 나는 벌레를 잡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거든. 그런 내가 스스로 멋지다 느끼면서도 문득, 넌 벌레를 잘 잡는 여자를 좋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 6시 15분. 알람이 울리면 멍한 정신으로 부스럭거리며 일어난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버스 시간에 맞춰 발걸음을 재촉한다. 버스정류장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인다. 아마 더 이른 시간에도 어딘가의 일터로 가 하루를 시작하려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겠지. 나도 처음에는 더 일찍 나왔는데 이제 루틴이 생겨서 조금 늦게 나온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좋아. 뺨에 서늘한 공기가 닿으면 네 생각이 더 선명해지니까.


회의를 하기 전에 짬이 되면 커피도 한잔 마시고 삶은 계란도 까먹는다. 부지런히 입과 손을 움직이면서도 간혹 널 떠올릴 수 있는 날은 여유가 있는 날이다. 예전에 자우림의 김윤아가 자신의 음악과 인생을 얘기하며 "직조한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는데 정말 멋있는 표현이라고 생각. 그리고 궁금해졌지.  어떤 질감과 색으로 내 인생을 직조하고 있을까하고.


"악이란 무엇인가?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에게도 창피를 안겨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얻는 자유란 무엇인가? 어떤 행위를 해도 부끄럽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예전에 우연히 보게 된 글귀. 내 안의 무언가와 통했는지 보자마자 적어두었. 앞으로의 내 삶은 이렇게만 채워나갈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 혼자서도 그럭저럭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닌 것 같아.

부쩍 네 생각이 난다. 내가 보기보다 겁이 많다는  알고 있겠지. 내 삶을 위험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늘 경계하며 지내왔다. 넌 말할 것도 없지. 너 그리고 너에 대한 사랑은 예상할 수 없는 가장 위험한 존재니까.

때때로 외롭다 느낀 적도 있었지만 그때 잠시뿐, 금방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요즘은 회복이 더뎌지는게 느껴진다. 그리움이 지워지지 않는다.


퇴근은 언제나 좋은 거였는데 요즘은 그다지 별로. 부쩍 일찍 지는 노을을 보면 마음이 서글퍼진다. 오늘 환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내식당 반찬은 어떤 게 나왔는지 너에게 조잘조잘 말하고 싶어져 더욱 입을 앙다문다. 덕분에 발걸음이 더 빨라졌어.

밖에서 어른스럽게 구는 게 조금 지칠 때, 긴장한 어깨가 뻐근할 때, 어딘가에 기대고 싶을 때. 네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네 어깨에 기대어 네 손을 잡고 따뜻한 체온에 위로받고 싶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칠 때면 집에 거의 다다를 쯤이.

잠에서 깨듯 다시 북적이는 일상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책을 보고, 다음 날 출근해서 할 일을 정리하고 잘 준비를 하지.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하루지만 나의 오늘을 너와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의 하루에 내가 있다면 정말 기쁠 것 같은데.


잠이 들락 말락 할 때쯤이면 새삼 지나간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들이 내게 남겨준 좋은 것들 때문에 이렇게 널 그리워할 수 있는 거지 싶어서.


나는 네가 누군지 아직 모르지만 이렇게 널 그리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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