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쉬어가는 상담사
상담을 쉬어가는 시간, 나에게 쓰는 편지
요즘 나는 상담을 잠시 쉬어 가고 있다.
갑상선암 수술 이후, 전이가 확인되었고 곧 방사선 치료를 앞두고 있다. 자연스럽게 상담 사례를 줄이게 되었고, 몇몇 내담자들과는 종결을 준비 중이다. 병가를 앞두고 있지만, 이 시간을 그냥 쉬는 시간으로만 두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덧 상담 일을 시작한 지 18년이 지났고, 20년이라는 숫자가 멀지 않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마음을 들어주고, 어깨를 함께 내어주며 살아온 시간. 돌이켜보면, 나 역시 내담자들과 함께 자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긴 여정 끝에,
지금 나는 나만의 조용한 기념을 준비하고 있다.
글을 쓰는 일이다.
상담 중에는 다 하지 못했던 말들이 있다.
언젠가 내담자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
말로는 다 전하지 못했던 위로,
그리고 내 마음 한쪽에 오래 남아 있던 감사와 애틋함. 나는 그것을 하나씩 글로 풀어내고 있다.
마치 마지막 인사로 받은 편지의 답장을 쓰듯이.
내가 상담자로 살아오며 지닌 가장 소중한 자산은 ‘말’이었다. 말로 사람을 살필 수 있다는 것, 말로 관계를 엮고 마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들이 가장 조심스러울 때가 바로 ‘상담이 끝나갈 때’였다. 이별 앞에서 우리는 자주 침묵하게 된다. 애써 담담한 척하고, 괜찮다고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묵직하다. 상담을 경험한 이 들은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조용히 글로 답장을 쓰고 있다.
상담 중에 다 전하지 못한 마음을, 조금 늦게라도 나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다정하게 전하고 싶다.
특히 오랜 시간 함께했던 학대 피해 아동들… 그들의 삶이 이제는 조금 더 안전하고 따뜻해졌기를, 혼란스럽고 무거웠던 그 마음 위에 단단한 자아가 자라나기를 바란다. 가끔은 그 아이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문득 떠오른다.
한 사람의 상담자로서, 무엇보다 어른 사람으로서—
그들의 편안함을 마음 깊이 빌고 또 빈다.
이 작업은 나에게 깊은 치유가 된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다시 한번 그 시간을 떠올리고, 그 순간의 숨결을 되새긴다. 글쓰기는 기억을 정돈하게 하고, 감정을 안전하게 흘려보내게 한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더 단단해지는 동시에, 한결 더 다정해지는 것 같다.
혼잣말처럼 시작된 글에 어느 날 누군가가 답글을 남겨준다. 잘 읽었다고, 위로가 되었다고, 자신도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
그럴 때마다 나는 이 말 없는 상담이, 글쓰기라는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요즘 나는 두 딸들과 함께 동화책을 만들기도 한다.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상실과 회복을 동화 속 장면에 담아낸다. AI와 그림을 구상하여 그리고, 딸들과 문장을 고르고, 완성된 책을 보며 가족들 모두 함께 뿌듯해한다. 이 또한 상담의 또 다른 얼굴 같다.
마음을 다루는 일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고,
그 어느 것도 덜하거나 더하지 않다는 걸 배운다.
앞으로 상담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삶의 여러 조건들까지도 지금은 모두 과도기 한가운데에 있다. 내 건강도, 정체성도, 경제적인 기반도 그 어느 하나 분명하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글을 쓰며 더욱 확실해지는 게 있다.
나는 내가 걸어온 이 길을 좋아하고,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나에게는 축복이다.
지금 잠시 멈추는 이 시간이
또 다른 회복의 시작이 되기를 바라며,
그리고 회복울 통한 단단함으로
다시 누군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오늘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본다.
“잘 해왔어. 그리고 지금도 잘하고 있어.”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도
나에게 편지 한 번 써보시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