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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희망은 동네 손맛 좋은 할머니

문학적인 식탁: 문학 속 식탁이 오늘의 식탁과 만날 때

by 황유미 Mar 19. 2025
문학작품 속 식탁이 21C 소설가의 식탁과 만난다면? 삼시 세끼 집밥을 추구하는 집밥주의자 소설가가 문학 속 식탁을 통해 오늘의 인생을 맛있게 요리해보려고 합니다.



직업: (소설을 쓰지 않는) 소설가입니다만,


대외적으로 내 직업은 ‘소설가’지만 평소 소설을 읽거나 쓰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쏟는 일이 있다. 사람들의 집에 방문해 ‘살아온 이야기를 보고, 듣는 것’이다. 2021년부터 지금까지 이른바 주거취약계층이라 분류된 70대 이상 고령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나누는 일로 지금껏 용케 밥 벌어먹고 사는 중이다.


이상하게도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만…”이라는 말 앞에서는 불신이 가득한 얼굴로 잔뜩 날을 세우고 있던 사람도 순식간에 해리포터에 나온 마법 젤리라도 먹은 듯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2018년에 펴낸 내 작디 작은 소설집 한 권이 알만한 대학교 로고가 떡하니 박혀있는 명함조차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낸 것이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니 연구실에서 내가 쥔 마법 젤리가 필요한 날마다 연락이 왔고, 그렇게 가가호호 할머니, 할아버지만 사는 집만 골라(?) 문을 두드리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구하는 수상한 직업으로 수년간 생계를 이어오고 있다. 정작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느라 소설은 ‘쓰는 중’ 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하는데도, 새로운 구술자를 만날 때마다 “소설을 쓰고 있다”는 내 이력을 열쇠처럼 쥐고 꾹 닫힌 철문 앞에 서서 조금은 비굴한 얼굴로 말을 건다.


“저랑 잠시 얘기를 나눠 주시겠어요?”



특이사항: 요리를 할 줄 압니다


굳게 닫힌 문을 열려면 문 안쪽에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준비해두어야 한다. 어쩌면 구직의 법칙과 비슷한 듯하다. 최대한 많은 문을 두드리고, 대답이 없어도 다시 다른 문을 두드리고, 마침내 문 안에서 “뉘신지?”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는 반드시 결정적 ‘한방’을 던져 문을 열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 ‘강력한 한방’ 덕분에 경력 단절을 딛고 1800년대에 말이 한 마디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해외 취업에 성공한 프랑스인 여성도 있다. 그녀의 강력한 한방은 바로 ‘요리’였다. 


<바베트의 만찬>, 이자크 디네센, 추미옥 옮김, 문학동네


“바베트는 요리를 할 줄 아오.”


정치적 상황 때문에 가족을 다 잃고 프랑스를 떠나야만 했던 ‘바베트’란 여성을 소개하는 추천서의 야심찬 마지막 한 문장이다. 그러나 정작 노르웨이의 한 시골 마을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엄격한 청교도인의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 자매에겐 이 문장이 처음부터 큰 힘을 발휘하진 못한다. 식사는 배를 채울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하고, 평생 회색이나 검은색 단정한 옷만 입고 살아갈 정도로 검소한 자매는 가련한 이웃을 돕고자 하는 선의 하나만으로 바베트를 받아들이고, 바베트는 그렇게 자매와 함께 지내며 가사노동을 전담한다.


식습관과 행동 양식이 다른 것은 물론, 루터교가 아닌 가톨릭교로 종교마저 다른 바베트의 존재는 자매를 긴장시킨다. ‘개구리까지 먹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프랑스식 식문화는 이 공동체에서는 죄악이다. 그러니 어느 날 바베트가 복권 당첨금이 생겼다는 소식을 전하며, 온 마을 사람들에게 그 돈으로 ‘프랑스식 만찬’을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는 그녀의 행운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뻐하면서도, 걱정부터 앞선다. 오죽하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이송해온 만찬용 식재료를 부엌에 들인 날에는 불안이 극에 다다라 바베트가 요리에 독을 푸는 악몽까지 꾼다. 부엌에서 푸르고 딱딱한 껍데기 안에서 목을 빼내는 바다거북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다.


낯선 식재료에 대한 거북함, 감히 ‘쾌락’을 탐닉하는 만찬을 열다니 우리가 마을 사람들을 다 죄악으로 몰아넣는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까지… 자매가 느끼는 이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의 근간은 ‘나, 우리’와 다른 타자에 대한 경계심이다. 이제 자매의 속마음을 내 말투로 옮겨 번역을 해본다. 


“아, 불안해 죽겠네. 저 여자, 대체 우리한테 뭘 먹이려는 걸까?”


"혹시 이런 느낌이었을까? 놀랐을 법도 하다..." (사진: Unsplash의Luca Ambrosi)



말보다 강력한 ‘맛’의 힘


노르웨이의 작고 목가적인 공동체에서 바베트는 불시착한 외계인처럼 튀는 존재이지만 의외로 어렵지 않게 마을 주민들에게 받아 들여진다. 자매가 알려준 북유럽식 요리를 금세 훌륭하게 해내고, 식비마저 아껴서 가난한 이웃을 먹이는 일에 손을 보태기까지 하니 프랑스 출신 ‘수상한 가정부’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의심도 금방 누그러진다. 이방인으로서 첫 번째로 치룬 ‘적응 시험’을 ‘요리’라는 재주로 통과한 것이다. 


고급 레스토랑의 요리사였던 경력을 살려 준비한 프랑스식 만찬은 두 번째 시험대다. 마을 사람들은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무엇을 먹는지 모른다. 이 맛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마음이 누그러지고, 행복을 느낀다. 음식은 일단 먹어봐야 안다. 낯선 음식일수록, 정보가 없는 사람에게 구구절절 설명을 하는 대신 일단 먹어보라고 수저를 쥐어주는 편이 낫다. 말은 느리지만, ‘맛’은 생각이 끼어들 틈조차 없을 정도로 빠르기 때문이다. 만찬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전전긍긍하며 상상을 펼치던 이들도 만찬이 시작되자 말수가 적어진다. 모두 바베트가 준비한 음식에 감화된 것이다.



사실은 “밥 먹고가”라는 말이 무서웠다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는 일을 업으로 삼다보니 본의 아니게 ‘남의 집 밥상’에 덜컥 숟가락만 올려놓게 된 날도 있었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약속한 시간을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세 시간이 넘을 정도로 길어진 이야기는 점심, 저녁 때가 되면 한풀 꺾인다. 다른 건 몰라도 손님에게 ‘밥은 먹여야’하기 때문이다. 


바다거북 만큼 충격적인 식재료를 본 것도 아닌데 나는 매번 “밥 먹고가”라는 말에 도둑놈 제 발 저리 듯 움찔거렸다. 목적을 달성하면 떠나버릴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쳐두었던 내 안의 바리게이트를 뚫고 들어오려는 시도처럼 느껴졌다. ‘빈곤’이라는 찌든 떼가 구석구석 낀 공간을 날렵하게 탐색한 뒤에 내 몸 하나만 ‘쏙’ 하고 빠져나오려는 얕고 부끄러운 속내가 속속들이 다 발가벗겨질 것만 같았다. 


기왕 밥때가 되었으니 온 김에 식사나 하고 가라는 이 계산 없는 호의 앞에서, 나는 무엇이 두려워서 그렇게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나. 활력, 생명의 불씨가 하루가 다르게 희미해지는 노인에게서 보이는 죽음의 그림자를 목격할 때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은 최대한 빨리, 산뜻한 방식으로 ‘탈출’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던 것이다.



동네에서 ‘손맛’으로 유명한 할머니를 만난 날


한번은 80대 여성 노인이 사는 집에 찾아갔다. 그날은 유독 대화가 어려웠다. 상대는 평소라면 ‘이쯤 하면 이야기 보따리가 풀릴 텐데…’ 싶은 순간조차 뭔가 이야기를 시작 하려다가 다시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곤 했다. 말수가 적고, 과묵한 분이었다. 그게 문제는 아니지만,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계속 얘기를 들려달라고 떼를 쓰는 무례한 사람이 되는 기분은 영 좋지 않다. 종종 그런 상황에 처하지만, 아무래도 적응이 되진 않는다. 


선물로 사간 귤을 맛있게 드셔서, 같이 귤이나 까먹으면서 <미스터 트롯> 우승자나 점치고 있었다. 그렇게 십분 이십분, 시간은 잘도 가는데 본론은 시작하지도 못하고 “요즘 날씨가 너무 춥죠…” “겨울이 다 그렇지.” “건강은 어떠세요?” “노인네가 다 그렇지.” 하는 식으로 내용이 없는 겉도는 대화만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갑자기 현관문 쪽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지금 몇 시지? 사람들 온다고 했는데…”


시간은 여섯 시, 저녁 시간대였다. 현관문을 열자 여성 노인들이 하나, 둘 기다렸다는 듯 줄을 맞춰 입장하기 시작했다. 못보던 얼굴에 반가워하면서도 다들 딱히 놀라진 않고 ‘그런가 보다’ 하는 표정으로 나를 무심하게 지나쳐가는 것이 범상치 않았다. 어떤 설명도, 소개도 필요 없다는 듯 그냥 내 얼굴만 한번 슥 보더니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가 알아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랄까, 은밀한 사교 클럽의 회동 현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평소 자주 만나는 동네 친구들이 종종 이 집에 모여 이렇게 밥을 같이 먹는다는 부연 설명은 나도 홀린듯 밥그릇을 받아든 뒤에야 들을 수 있었다. 이 집이 ‘김치 맛집’으로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것도, 김치를 한가득 담아 주변에 나눠주기까지 한다는 말도. 손맛이 얼마나 좋은지 만약에 우리 같은 할머니들만 사는 집이 생기면 이 사람이 1층에서 반찬 가게를 해야만 한다, 어디 자리만 있으면 당장 시켰을 거다, 라는 말들도. 음… 그렇군요. 눈 앞에 있지만 잡히지 않던 희미한 인물에 대해 친구들이 하나 둘, 증언을 보태 한 인물에 관한 이력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다정하고 대범한 성격, 특기는 요리, 그 중에서도 김치, 장래희망은 여성 노인 공동체주택 반찬 가게 사장…


그 모든 말이 번갯불에 볶은 콩처럼 튀어올라 밥상 위를 오가는 순간에도, 정작 밥상을 차린 장본인은 한 마디 말이 없었다. 여전히 과묵하게,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총각 김치는 정말 제대로 잘 익어서 맛있었다. 역시 이 다음에 할머니가 되었을 때 인기가 있으려면 ‘손맛’이 답인가. 납득하고 다시 코를 박고 밥 먹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요리사는 그날 뭐가 들어갔는지, 어떻게 맛을 냈는지 끝내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다만 오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같이 식사를 이어갔다. 잡곡을 넣은 찰밥에 총각 김치를 반찬삼아 부지런히 숟가락질을 하는 동안 나는 정말 오랜만에 머릿속 ‘탈출’ 버튼 따위는 잊을 수 있었다.



[동네 손맛 좋은 할머니가 되기 위해 훈련중인 조개크림스튜]   

가리비, 모시조개, 명주조개, 바지락 등 조개 종류를 한가득 준비해서 깨끗이 씻는다

검은 비닐을 씌우고 소금을 밥 숟가락으로 한 스푼 넣은 뒤 냉장고에 넣어서 해감을 한다

조개를 넣고 화이트와인을 두르고 찌다가 요리용 생크림을 조개가 자작하게 잠길 정도로 부어준다

부족한 간은 소금으로 맞춘다

동네를 다 사로 잡겠다는 야망으로 끓여본 '조개크림스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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