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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편안한 순간을 떠올려봐.

바들바들 화가 차오름을 느낄 때

by 뱅울

하루하루 살아나갈수록,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모여 나를 완성한다는 생각이 든다. 입 밖으로 내뱉는 단어도, 상황을 대하는 태도도, 판단하고 움직이는 행동 까지도.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든다는 생각. 원래도 주변에 관심이 참 많은 사람이지만 요즘은 더욱 주위를 둘러본다. 우연히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보고 그중에 내가 좋아하는 조각들을 찾아 모아둔다. 그런 것들을 자꾸 보고 따라 하다 보면 근사하게 변해가는 나를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오늘은 그 태도 중 하나에 대한 이야기다.


어제는 영화관에 들러 승부를 보고 왔다. 처음부터 승부를 보려고 나간 외출은 아니었다. 휴무 첫날 서울 나들이를 나간 건데, 시간이 조금 남았고. 마침 사람들이 승부라는 영화를 보고 좋은 후기를 남겼던 것이 떠올라, 상영시간을 확인했더니 마침 자리가 있어서 보게 된 것. 그래서인지 큰 기대는 없었고 바둑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다 정도까지만 파악한 채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승부는 잔잔하게 보기 괜찮은 영화였고, 무엇보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의 조각이 많이 담긴 영화였다. 그중에서도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보고 나와서 집으로 오는 동안에도 자꾸 맴도는 장면이 있었다. 그건 바로 극 중 이창호가 마인드컨트롤을 하는 장면이었다. 바둑은 격자 위의 전투 같다고 늘 생각해 왔다. 동생이 아주 어릴 적 바둑을 배울 때 옆에서 장난치며 얻어 배운 것들이 몇 있었는데, 그러는 동안 바둑이 나랑 정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입을 일단 다물고 오랜 시간 겨뤄야 하며, 여러 경우의 수를 머릿속으로 계산해서 그중에서 가장 승률이 좋을 것 같은 한수를 두는 것이 바둑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걸 못한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 머리를 굴려서 둔 한 수를 실수로 만들어버리는 상대의 공격 같은 것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할 자신이 없었다. 흔들리는 눈빛을 시작으로 불안이 분노가 되어가는 과정을 오롯이 상대에게 내어 보이고 그 판의 기세를 전부 상대에게 내어줄 것 같은 나. 언젠가 내가 지금 공격을 받고 흔들리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일단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나는 그 방법을 몰라서 도전조차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바둑에서 뿐만 아니라 그냥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당황한 티를 내지 않는 것이 꽤 중요한 것이더라고. 이 모든 과정을 겪은 뒤 보는 이창호의 마인드컨트롤장면이 또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준 것이다. 눈을 감고 자기가 제일 편안하게 생각하는 공간에 와 있는 것처럼 상상하기. 그렇게 편안함을 되찾고 눈을 다시 떴을 땐 당황하게 만들었던 그 공격을 해결할 방법을 찾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창호는 그 대국에서 승리하게 된다. 호랑이 같은 스승님과의 전투였음에도 해낸 것은 그 짧은 순간 덕분이었다는 게 나에게 큰 울림을 준 것이다. 그리고 그 조각을 마음에 새겼다. 나도 차분해져야지. 분노와 불안을 평온으로 잠재워야지. 바들바들 떨리는 순간 떠올릴 편안한 장면을 찾아야지. 하고서 집으로 왔다.

tempImageIvz74R.heic 그 생각을 하며 걷다가 만난 아직 덜 피어있는 벚나무

그리고 휴무 둘째 날인 오늘 아침 갑자기 업무 메일이 왔다. 작년에 받은 지원사업 관련된 내용이었다. 최종 보고서와 지원금 반납 처리까지 완료된 상황에서 하는 지원사업 정보공시 관련된 내용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정보공시 해야 하는 단계를 알고는 있어서 당황하지 않았지만, 작년 내내 지원사업 메일만 오면 그때부터 해결하는 과정이 열받는 일 투성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이렇게 메일이 오면 메일 제목을 읽으면서부터 마음이 약간 좋지 않았다. "아 이제 또 뭘 해야 하는 거지. 이걸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변수들이 날 또 힘들게 할까." 메일을 받자마자 퀘스트를 완료하고 싶어서 e 나라도움에 들어가자마자부터 사달이 일어났다. 지난번까지 잘 있었던 공인인증서가 갑자기 사라진 것! 이 정도는 화에 낄 것도 아니지 공인인증서쯤이야. 하면서 약간 바들대는 손을 잡고 무사히 재발급을 받고 나서 들어가 보니 이게 무슨 일인지, 매뉴얼에 나온 첫 단계부터 막혀버린 것이다. 하라는 대로 아무리 해봐도 검색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나와서 안했어요 하고 가만히 있기엔 정보공시를 안 하면 또 안 하는 대로 불이익이 있어서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매뉴얼도 다시 보고 QnA도 다시 보고 첨부해 준 그 많은 파일을 열어보고서도 답이 없어서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도 나와 같은 상황에 있었던 사람의 글이 없었다. 이제 그때부터 막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또 이러나. 또?!!!! 이게 끝까지!?!!!?! 이런 마음이 한가득. 좀처럼 진정이 안 되는 몇 분을 보내고서야 문득 떠올랐다. 어제 본 승부의 장면이, 그걸 보며 먹은 내 마음이.


어제 먹은 마음인데 오늘 바로 까먹고 바들댄 사실에 조금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도 지금 딱 떠올랐음에 감사하며 심호흡 한번 하고는 눈을 일단 감았다. 그 장면을 따라 해봤다는 뜻. 눈을 감고서 내가 제일 편안해하는 순간을 아직 마련해놓지 못했으니 어제의 그 장면을 떠올렸다. 시계방에서 시계가 째깍대고 이창호가 눈을 감고 있는 그 장면을 떠올리니 괜히 마음이 편해졌다. 오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데? 싶어서 눈을 뜨고는 차분해진 마음으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문의사항을 전달했다. 이러저러하니 한 번 확인해 달라고. 30분 만에 문의사항 해결이 완료되었고 전체메일로 중요 공지가 재전송되었다. 마지막으로 안내 전화를 받고 나니 모든 것이 해결되어 다시 평화로운 휴무 오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마도 저 화남이 조절이 되지 않았더라면 오늘 할 일이 산더미인데 엉망인 기분으로 보냈을 테지 싶어서 아찔했다. 조금씩 조절해 봐야지. 바들바들 차오르는 신호가 느껴진다면 일단 눈부터 감아봐야지. 어제 먹은 마음에 오늘 또 하나를 배웠다. 연습해야 내 것이 될 테니 앞으로도 잘 이겨나가 봐야지 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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