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4
그 애를 처음 본 곳은 7월의 제주 시골의 바닷가였다.
하염없이 수평선을 바라보던 새하얀 얼굴 작은 키에 검다 못해 푸른빛이 돌던 긴 머리카락.
하루 이틀 사흘... 3일 연속 그 애는 같은 장소 같은 얼굴로 그렇게 서있었다.
그리고 4일째 날, 역시나 보이는 그 애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지만 알지도 못하는 여자한테 말을 붙일 정도의 주변머리도 없고 성격도 아니었기에 여느 때와 같이 곁눈질로 흘깃하고 지나 칠 무렵 같이 산책 나온 이모의 반려견 도리가 갑자기 그 애에게 달려들었다.
"앗! 안돼~도리야"
평소 얌전하던 도리가 느닷없이 사람에게 뛰어들자 나는 당황해 소리치며 목줄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지만 이미 놀란 그 애는 엉덩방아를 찧은 뒤였다.
"괜찮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한 손으로 도리의 목줄을 짧게 잡아 팔을 멀리하며 도리의 접근을 막고는 다른 한 손을 넘어져 있는
그애 에게 뻗었다.
"네, 괜찮아요 조금 놀랐지만요"
내가 내민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고 일어선 그 애는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고는 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름이 도리에요?"
"이름요? 아니 제 이름은... 아! 이 녀석요? 네, 도리에요 평소 얌전하고 같은 개를 만나도 피해 다녔는데..."
나는 갑자기 일어난 일과 웃는 얼굴로 말을 거는 모습에 당황해 횡설수설했고, 그 사이 벌써 그 애는 도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저기 다시 한번 사과드려요 다치거나 한건 아닌지..."
물론 다치거나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다시 한번 사과했다.
"설마요 모래해변에서 엉덩방아로 다치면 큰일이죠 ~"
자기 얼굴을 마구 핥는 도리를 품에 안아보며 경쾌하게 대답은 그 애의 두 눈동자가 반짝인다.
그날밤 꿈속에서 그 애를 다시 만났다.
같은자리 같은 모습으로 바닷바람에 제멋 때로 나부끼는 머리칼.
그리고 멀리 보이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는 듯하다 이내 바로 내 눈앞까지 얼굴이 맞닿자
뭐라 중얼거리며 웃는 새하얀 치아와 빨간 입술.
번쩍하고 두 눈이 떠짐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뭐야?'
갑작스러운 꿈에 놀란 나는 한동안 멍하게 허공만 바라보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4시 34분... 일어 나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다시 잠이나 자자'
일으켰던 몸을 다시 침대 위로 내던지듯 눕고는 눈을 감았지만 한번 깬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만약에 오늘도 그 애를 만나면 말을 걸어볼까?'
'도리를 데리고 가면 그 애가 먼저 아는 척을 하지 않을까?... 아 그건 너무 찌질한가'
'나랑 나이가 비슷한 거 같은데 여기 사는 앤가?'
그렇게 한참 동안 그 애를 생각하다 환하게 밝아져 오는 창가의 아침 햇살을 느끼며 다시 잠들었다.
'아... 역시 없구나’
언제쯤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자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낮 12시가 훌쩍 넘어간 후였다.
헐레벌떡 마치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급하게 해변가로 뛰어나갔지만 아니나 다를까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하긴 그 애를 보던 시간은 언제나 10시 전이었으니까 오늘 있었다 해도 이미 돌아갔겠지...'
왠지 어깨가 쳐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실망감.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도리랑 안 나오셨네요?"
갑자기 들려온 인사에 고개를 드니 그 애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을 귀에 꽂으며 웃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 오늘 도리는 이모랑 동물병원 갔어요 앓고 있는 귓병 때문에... 요"
방금 전 실망했던 마음이 그 애를 보자마자 왠지 모를 기쁨과 설렘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랬구나... 혹시 오늘도 도리를 만나게 되면 주려고 간식 가져왔거든요"
그 애는 반바지 주머니에서 반려견용 소시지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저기 내일은 아마 같이 산책 나올 것 같아요, 이따 저녁에도 산책은 시켜줄 거지만 너무
늦을 것 같으니까 내일이라도..."
바보같이 말끝을 깔끔하게 매듭짓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보며 그 애가 웃는다.
"그래요 그럼, 내일 만나면 줄게요"
그 애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용기를 낸 내가 말을 걸었다.
"저기 계속 며칠째 계시던데 이곳을 좋아하나 봐요?"
내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그 애.
갑자기 간밤에 꾼 꿈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네, 여기서 보는 바다가 제일 예쁘게 보이거든요"
살짝 아리송한 대답.
내 눈에는 어디서 보든 다 똑같아 보이는 바다인데...
"여기 살아요? 전 서울이 집인데 방학 동안 이모집에 내려와 있거든요"
사실 제일 물어보고 싶은 건 이름과 나이였다, 하지만 도저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사는 곳을 물었지만, 순간 이 질문이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불안감이 밀려오며 내면의 목소리가 스스로를 꾸짖는다.
'사는 곳을 알아서 뭐 하게? 무슨 스토커 같잖아 멍청아!'
질 물을 던져놓고 혼란한 내 표정을 읽은 듯 그 애는 풋~하고 짧게 웃음소리를 내며,
"여기서 지내고는 있는데 저도 언니네 집에 온 거예요, 이 해변 끝 빨간 지붕 집요.
언니네 집도 바다와 가깝지만 이렇게 직접 닿을 듯 가까이 있어야 편하게 숨이 쉬어지거든요"
곧잘 대답해 주는 말들에 안심을 하면서도 뭔가 조금씩 오묘한 느낌의 대답들.
그리고 이번에는 먼저 그 애가 나에게 물었다.
"근데 몇 살이에요? 저랑 비슷해 보이는데, 전 18살이에요, 이름은 서지은이고요"
내가 제일 궁금해하던 것들을 알게 되자 나도 재빠르게 소개를 했다.
"나도 아, 아니 저도 18살이고 이름은 정동영이에요"
"역시 나랑 동갑이었구나~ 그럼 말 놓자 괜찮지? “
내 나이와 이름을 듣자마자 말을 놓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러자 나도 좋아~"
그렇게 지은이와 좀 더 이야기를 하다 내일아침 다시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웬일이야? 무슨 좋은 일 있어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네?"
이모가 저녁을 먹는 내 모습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괜히 어울리지도 않는 헛기침을 하며,
"좋은 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어 “
"그래? 뭐 어쨌든 웃으니까 좋네~ 얼른 밥 먹어 국 더 줄까?"
이모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빈 국그릇을 들고 일어선다.
저녁을 먹고 도리와 함께 해변으로 나갔지만 그 애는 없다.
'하긴 여름이라 해가 길어도 늦은 시간이니까...'
나는 도리와 익숙한 코스로 한 바퀴 돌고 집으로 와 침대에 누워 내일 지은이를 만나면 할
얘기들을 미리 생각해 본다.
'성격은 엄청 밝은 것 같은데 살짝 4차원 느낌도 들지? 그런데 가족 중에 외국인이 있나?'
가까이에서 바라본 지은이는 하얗다 못해 투명한 느낌의 피부와 눈동자에 살짝 푸른빛이 도는 신비한 느낌의 예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물어보는 건 좀 아니지?'
나는 그렇게 한참을 어떤 말들을 해야 좋을지를 고민하며 괜찮다고 생각되는 이야기 소재
몇 개를 휴대폰 메모창에 적어 놓는다.
그렇게 지루하고 우울했던 여름방학이 지은이라는 존재 하나로 왠지 모를 기대감과 설렘의 빛으로 바뀌고 있었음을 그때까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