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보우 시티로 들어선 커다란 기차가 멈춰 서고 텅 비어 있던 역에는 금방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로 북적북적 해졌다.
저마다 한아름씩 이고 지고 가는 짐을 든 이들 맨 뒤로 큰 키에 깡마른 체구를 가진 소녀가 누군가를 찾는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화사한 봄꽃들이 만발한 봄의 모퉁이에서 유행과는 조금 뒤떨어져 보이는 어두운 분홍 투피스 차림에 낡은 큰 짐가방을 두 손에 들고 있던 긴장한 소녀의 눈동자는, 곧 반가운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소리친다.
“오덕아~”
소녀의 경쾌한 외침에 셈세한 레이스와 자수로 수놓아진 리본을 목에 묶은 심드렁한 표정의 오리가 슬쩍 한쪽 날갯짓으로 답하며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소녀를 반긴다.
“여~ 소심쟁이 송나나가 진짜 왔네?
사실 난 좀 전까지도 네가 정말 오는 걸까 하고 의심했는데 말이야”
“쳇,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두고 보라고 꼭 멋지게 성공해서 떵떵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불과 몇 분 전까지 불안감이 녹아있던 소녀의 두 눈동자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안도와 자신감으로 변해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나란히 가는 발걸음 뒤로 꽃잎들이 나풀거렸다.
송나나.
올해 20살로 여 학교를 마치고 졸업과 동시에 취직하여 자신이 살던 흰 바위 마을에서 기차로 4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레인보우 시티로 왔다.
그녀의 꿈은 유명 소설가가 되는 것인데, 그 꿈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위대한 서점’에 취직에 성공하여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친구 오덕이의 집에서 오늘부터 신세를 지게 되었던 것이다.
“얼른 집에 가자, 나 식사시간이 지나 당이 떨어지고 있어서 어지러워”
노란색 자동차의 트렁크를 열어주고 나나가 짐가방을 싣는 동안 깃털 속에 넣어 다니는 작고 둥근 거울을 꺼내어 자기 얼굴을 바라보며 오덕이가 말하자, 짐 가방을 트렁크에 밀어 넣은 나나는 윗옷 작은 주머니에서 조금 찌그러진 초콜릿을 내밀었다.
“많이 어지러워? 그럼 이거라도 일단 먹을래?”
“나나야~ 내가 이런 싸구려 불량식품을 어떻게 먹니?
차라리 길바닥에 주저앉으면 앉았지...” 하고 인상을 쓰자,
“넌 정말 여전하구나?”
나나가 웃으며 말한다.
“됐고, 어서 타기나 해, 빨리 집에 가서 최고급 화이트 초콜릿과 유기농 캐모마일 티를 마셔야 하니까”
투덜거리면서 운전석으로 가는 오덕이를 바라보며
“응, 나도 배고파 어서 가자” 하며 나나도 차에 올라탄다.
오덕이의 차에 탄 나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 풍경에 잠시 잊고 있었던 흥분과 설렘이 크게 일어 심장이 꽝꽝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구나’
나나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던 흰 바위 마을은 아주 작은 농촌마을이다.
학교는 마을버스로 30분 정도 가야 하는 중소도시에 있는 곳으로 다녔지만, 이곳과 비교하면 그곳도 작은 시골일 뿐이다.
나나는 언제나 고향을 멀리 떠나 대도시로 오고 싶었다.
그렇다고 고향이 싫은 건 아니다, 부모님과의 사이도 크게 나쁘거나 문제가 있지는 않았지만 나나는 서로가 서로를 모두가 너무나 잘 알며 마치 한 가족처럼 지내는 그곳이 조금씩 답답해졌고, 16살 어느 날부터인가 누구 누구네집 딸이 아닌 그냥 처음부터 아무 정보 없이 완벽한 타인으로 자신을 바라봐주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고민하고 계획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머릿속의 바람처럼 흐르지는 않는 법.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홀로 마을을 떠나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취업도 문제였지만 먹고 자는 기본적인 것을 해결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나나에게는 용돈을 모아놓은 푼돈이 전부였고, 이제 막 졸업한 어린 딸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으로 보내기를 원치 않는 부모님이 지원을 해줄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고민하면서 일단 성적을 올리는데 집중했다. 성적이 좋아야 어디든 취업이 될 테니, 일단 다른 복잡한 문제는 뒤로 미뤄두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학년이 시작되었을 때 오랜 여행에서 돌아왔음을 알려준 오덕이의 연락을 받고 자신의 독립계획을 말해주며 도움을 요청하자, 오덕이는 언제나 그렇듯 심드렁하게,
“그래 얼마든지 내 집에서 지내~ 나야 있는 건 돈뿐인데 너 하나 도와주는 게 뭐가 어렵겠니?”
하면서 구원의 손길을 뻗어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가장 큰 문제였던 지낼 곳을 해결하고는 더욱더 공부에 열을 올리며 최고의 성적을 유지했고, 여름 방학이 끝난 이후부터 부지런하게 이곳에 있는 여러 회사와 기관들을 상대로 이력서를 내면서 면접을 봤다.
물론 처음부터 위대한 서점에 취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 경쟁률도 높고 신입사원을 자주 뽑지 않았기에 일단 다른 곳에서 일하면서 기회를 기다려 보려 했는데, 학기말쯤 기적같이 위대한 서점의 신입사원 공고가 났고 덜컥 합격까지 하게 되었으니, 나나는 이것은 하늘이 내린 계시 혹은 운명과 같은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취업에 성공하고 지낼 곳도 마련되었다고 모든 게 시원하게 풀리지는 않았다.
바로 대도시로 떠나는 것을 반대하는 부모님과의 마찰로 여러 달 동안 많이 힘들었고, 나나는 애원, 고집, 설득 같은 방법을 끊임없이 시도해 간신히 겨우겨우 허락을 받아냈지만 떠나오는 날까지도 부모님은 못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다.
“미안해 엄마, 아빠...”
창밖을 바라보던 나나가 작게 중얼거린다.
“나나야 앞을 봐바, 위대한 서점이야”
운전을 하는 오덕이의 말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나나가 정신을 차리고 지나치고 있는 엄천난 크기의 위대한 서점의 건물을 바라본다.
‘아... 정말 내가 저곳에서 일하게 되다니...’
‘위대한 서점’은 레인보우 시티의 가장 큰 자랑이자 유명한 명물인 곳이다.
아주 오래전 노점에서 10권의 책으로 시작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몇 대에 걸쳐 같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지금은 지상 6층, 지하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대형 서점으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세상의 모든 책들이 있으며, 일반인들은 구할 수도, 존재 자체도 알 수 없는 위험한 금서나, 희귀서, 마법서까지 취급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서점에는 넘치게 방문하는 사람들로 매일매일 성업 중이며 그중에는 다른 영역에서 온 손님들과 마녀, 마법사, 연금술사, 예언자, 주술사 같은 이들도 볼 수 있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나나는 그 누구보다 위대한 서점에 자주 드나든다는 유명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장 큰 기대를 안고 있다.
위대한 서점은 단순히 책을 팔고 사는 곳만이 아닌, 자체적으로 엄청난 게 많은 도서들도 발행하며, 3년마다 큰 문학상 공모전을 열어 새로운 작가들을 양성하는데, 이 공모전의 위상이 서점만큼 대단하여 이곳을 통해 등단하면 유명 작가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기 때문에 신인은 물론 아직 빛을 보지 못한 기성 작가들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며, 소설가가 꿈인 나나도 역시나 언젠가는 반드시 위대한 서점의 문학상을 통해 화려하게 등단하리라는 꿈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자, 이방을 쓰고 촌티 팍팍 내면서 눈치 보지 말고, 필요한 게 있으면 일하는 사람들 아무에게나 말해, 알았지?”
“와~~ 정말 이렇게 크고 좋은 방을 써도 되는 거야? 진짜?”
나나는 도착한 오덕이의 큰 저택에서 방을 안내받고 놀라움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좋기는~ 그냥 평범한 방중 하나야~~ 여하튼 짐 정리하고 응접실로 내려와 저녁 먹게, 알았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버릇인 손거울로 자기 얼굴을 살피던 오덕이가 아직도 가만히 서있기만 라는 나나를 툭치며 말하자,
“어? 응... 알았어 금방 정리하고 내려갈게”
나나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오덕이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나나는 자신의 짐가방을 열어 몇 벌 되지 않는 옷가지와 머리빗과 거울, 머리끈과 장갑,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책들과 목숨과도 같은 자신의 글 원고들을 옷장과 책장 위에 놓아두고는 침대 끝에 앉아 다시 한번 천천히 방안을 살핀다.
세련된 패턴이 그려진 벽지와 방안 가득 햇살을 받아내는 커다란 창문 옆으로 봄바람의 리듬에 맞춰 하늘거리는 얇은 연두색 리넨거튼과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식장과 책상, 처음 보는 독특한 인테리어 소품들부터, 바닥에 깔린 두툼하고 깨끗한 이국적인 카펫 위로 새하얀 실크 천으로 장식되어 있는 침대까지.
나나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비 현실적이어서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면 사라질 것 같았다.
‘오덕이가 진짜 부자구나...’
새삼 금수저인 오덕이가 친구로 있어 큰 행운이라 생각했다.
물론 오덕이가 평범한 집안의 오리라도 나나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였겠지만... 그래도 돈 많은 친구란 정말 좋은 것이구나 하고 느끼는 나나였다.
맛있는 음식들로 느긋하게 오덕이와 함께 저녁을 먹은 나나는 멀뚱히 응접실 한쪽에 놓여있는 전화기를 내려다보고 있다.
빨리 집에 전화해야 하는데... 무사히 잘 도착했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빨리 부모님께 전해야 하건만 선뜻 수화기를 들기가 쉽지 않다.
떠나는 기차의 창밖을 바라볼 때까지 나나를 쳐다보지 않던 아빠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보였고, 만약 엄마가 아닌 아빠가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더 이상 늦어지면 곤란하다, 나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수화기를 들고 천천히 집 전화번호를 누른다.
‘뚜루르르~ 뚜르르르~’
연결신호음이 울리자마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나니? 나나 맞지?”
“응, 엄마 나야~ 나 지금 오덕이네 집에 와서 짐 풀고 배가 너무 고파서 저녁먼저 먹고 전화하는 거야... 많이 기다렸어?”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미안한 마음에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나나에게 엄마는,
“가는 동안 멀미는 안 했어? 오덕이 집은 잘 찾아갔고?”
“엄마는 내가 아직 어린애야? 멀미는 무슨... 그리고 오덕이가 역까지 마중 나와줘서 편하게 왔어”
“그래... 오덕이한테 여러모로 신세네, 엄마가 고맙다고 꼭 전해주고, 친구라고 해도 너무 여러 가지 부탁 같은 거 하지 말고, 네 방 청소나 빨래 같은 건 알아서 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엄마의 잔소리가 또 시작되려 하자마자 나나는 황급히 엄마의 말을 끊으며 ,
“엄마~ 내가 다 알아서 잘할 테니 걱정 마, 도대체 같은 말을 집에서부터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나나가 지친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하자 잠시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돈다.
그러다 나나가 어렵게 “저기... 아빠는?”하고 묻자,
“아빠야 거실에서 마을 신문 보시고 계시지, 바꿔줄까?”
엄마가 나나에게 되묻자 놀란 나나가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 짓는다.
“아니~ 안 바꿔져도 돼, 여하튼 잘 도착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내일 첫 출근이라 오늘은 일찍 자려고 이만 끊어 엄마”
“그래, 알았어 무슨 일 있음 바로 연락하고... 그리고 언제든...” 하던 말을 멈추며,
“어서 쉬어라 피곤하겠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엄마가 먼저 통화를 끝낸다.
그날 밤 목욕을 하고 내일 출근할 때 입고 갈 옷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침대로 들어가 누운 나나는 저녁때 엄마의 통화를 다시 생각해 본다.
언제나 똑같은 레퍼토리로 돌림 노래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엄마의 잔소리. 이제 그 잔 소리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 저편으로 마음 한 구석이 이상하게 아려왔다.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할걸...’
본의 아니게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들이 후회스러웠고, 뒤돌아 앉아 마을 신문을 보고 있을 아빠의 익숙한 뒷모습도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다음에는 짧게라도 아빠랑 통화해야겠다, 엄마한테도 친절하게 말하고...’
나나는 부모님 생각을 뒤로하고 내일 첫 출근하는 위대한 서점에서 이 하루를 기대하며 폭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