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 Apr 03. 2024

멈춰야 할 때와 차야할 때를 아는 자

축구의 기술 그 첫 번째

 체험 수업 이후 며칠이 지나 축구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신입생들 유니폼을 맞추려는데 내 것도 주문을 넣을까 해서 전화하셨다고 했다.


 "어... 음.. 아. 네....."

같은, 앓는 소리에 가까운 말들 끝에

 "그.. 그럼 한 번  해볼까요?"

라는 대답도 질문도 아닌 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선생님 : 등 번호는 몇 번으로 하시겠어요?


나 :12번이요!

     (생일이 12월이라는 엄청난 이유로)


그렇게 나는 12번 선수가 되었다.






 금요일 아침.

 좀 더 잘까, 정말 축구라는 것을 시작하는 것이 맞는 걸까 망설여졌다. 그때 내 마음을 읽은 듯 카톡이 울렸다. 맘스사커로 이끌어준 아이 친구 어머님께서 집 앞에서 만나서 가자고 했다. 망설이던 마음을 접었다. 그분을 쫄래쫄래 쫓아가며 이것저것 물었다. 어찌나 든든했는지. 그분 뒤에 끈이라도 있었으면 꼬옥 잡을 뻔했다.


 두 번째 수업부터는 맘스사커 회원분들의 얼굴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선생님 말씀이 떨어지는 동시에 모든 훈련을 바로 이해하는 엘리트 같은 분 , 엄청 청순해 보이는데 공 앞에서는 달라지는 외유내강이신 분, 막강해 보이는 주장님, 발랄의 끝이신 분 등등.  다들 나와 또래인데도 확연히 생기 있고 활력 있었다.

 유난히 나의 얼굴과 몸에만 중력이 두배로 작용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던 시기였는데  맘스 사커 회원들을 본 후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특히 눈에 띄는 분이 계셨다. 모두에게 솔톤으로 인사해 주시는 분. 하이 파이브도 제일 높은 곳에서  진심으로 하고 몸을 풀 때도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린 채 골반을 좌우로 움직이며 댄스 하듯 하시던 분.

큰 키에 화려한 양말 색, 높게 묶은 머리까지 발랄함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흥겹고 유쾌하던지. 그 와중에 세심하게 신입의 적응까지 챙겨 주셨다.  어떻게 하면 저런 에너지를 가질 수 있는 걸까? 그야말로 다른 차원 속에 사는 분 같았다. 나도 몰래 자꾸만 관찰하게 되었다. 


 신입반이 따로 없어서 축구를 배운 지 일 년 된 어머님들과 같이 훈련을 시작했다. 민폐를 끼치는 일을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싫어하는 나는 뒤처지지 않기가 유일한 목표였다.


 어김없이 준비운동으로 시작했다. 이번엔 필사적으로 했다. 몸을 충분히 풀어줘야 한다고 많은 분들이 얘기해 주셨다. 다리를 ㄱ자로 들어 올려 오른쪽 왼쪽으로 꺾는 흉측한 자세까지 열심히 반복했다. 안쪽 허벅지 근육이 많이 다친다고 했다.



 준비 운동이 끝나고 훈련이 시작되었다.  팀을 둘로 나눠 골차기 연습을 했다. 나와 같은 팀이 된 순간 바로 버피테스트 확정이었다. 버핏 테스트를 하라길래 버핏? 워런 버핏? 뭐야 하고 있는 사이에 사람들이 팔 굽혀 펴기 같은 자세를 취했다가 벌떡 일어나 하늘에 박수를 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버피테스트라고 했다. 버피고 버핏이고 뭐건 간에  나는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카운트하는 속도에 맞추지 않고 나만 늦을 수도 없었다. 나중에는 신난 사람처럼 박수만 치게 되었다.


그다음으로는  둘씩 짝지어 한 명이 패스를 해주면 우선 막고, 그다음에 인사이드로 차서 패스를 해주고 또 막고 차고 이 동작을 반복하는 훈련을 했다.


"공을 발로 막고,

그 멈춰 선 공을 차기"


 후훗. 그 정도는 뭐,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시작과 동시에 엉망이었다. 발과 머리와 몸과 마음이 온통 따로 놀았다. 멈춰야 할 공은 데구루루 굴러갔고 굴러가야 할 타이밍에 공을 피해 허공을 뻥 차버린 다리는  머쓱하게 공기를 갈랐다.


멈춰야 할 때와 차야할 때를 아는 차원이 다른 자.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운동을 마치고 와서 오후 내내 차원에 대해 생각했다.


최근 읽고 있는 의식 혁명 책을 보면 의식 수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분노, 짜증 같은 것들은 낮은 수준의 의식이고 행복, 사랑, 만족 같은 것들은 높은 수준의 의식이다.


차원도 비슷한 것 아닐까?

차원이 달라져야 한다

어떤 깨달음이 강하게 온몸을 휘감았다.


 아이를 혼낼 때에도 아이와 같은 차원, 같은 바이브로 맞대응하는 순간 지옥을 맛본다. z라는 차원에서 싸움이 이어질 때 살짝 발을 빼고,  a라는 차원에서 바라보는 순간 순식간에 해결되곤 한다.

 손바닥이 맞부딪히는데 손바닥의 크기 자체가 다르면 손바닥이 큰 쪽에서는 손뼉이 아니라 간지럼이 되는 것처럼.






 차원을 높일 것이다. 의식적으로 그럴 것이다.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할 것이다. 축구팀 발랄하신 회원분의 댄스를 배워서라도 말이다.

 정신과 마음이 힘을 가지려면 육체가 먼저다.

그런 의미에서 축구하는 날 나의 차원은 불쑥 상승한다.


 아이에게도 더 높은 차원을 바라보고 높은 차원으로 사고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다. 그러면 일상의 하찮은 많은 문제들이 조금은 더 수월하게 보일 것이다.



차원을 끌어올릴 것.

미니 게임에서 한골이라도 성공해 볼 것.


흐릿하던 날들에 명확한 목표가 생기자 내 눈에도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전 02화 준비운동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