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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Mar 27. 2024

준비운동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준비되지 않은 매일을 맞이하는 것에 대하여


모두 자연스럽게 몸을 풀고 있었다. 가볍게 뛰는 분, 공을 몰고 가는 분, 스트레칭을 하는 분... 그분들 사이에서 나만 혼자 어색하게 서 있었다. 아, 그 와중에 누구보다도 빠르게 눈만은 좌우로 움직였다.


"자, 준비운동 먼저 할게요."


 주장이라는 분이 말씀하셨다. 전직 운동선수이신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운동인 다운 모습이었다. 맘스 사커회원이니까 같은 엄마라는 건데 믿기지 않을 만큼 포스가 느껴졌다.


 바사삭 거리는 초록색 운동복 상의, 역시 바사삭 거리는  나이키 운동복 하의 위로 야무지게 올려 신은 양말. 주장님의 운동복 차림을 보는 순간 급격히 내 옷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침에 옷장 앞에서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뭘 입지? 한 두 달 정도 PT를 받는 시늉을 해본 적이 있을 뿐 한평생 운동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나다.  면티와 면바지면 될까? 그러나 마땅한 면티와 면바지조차 없었다.


  남편의  면 운동복 바지가 보였다. 다리를 끼워 넣고 허리춤을 잔뜩 조였다. 길이는 딱 맞았다. 남편의 짧은 다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상의는 아들의 두툼한 기모 티셔츠로 골랐다. 완벽하다. 가족들이 나를 응원하고 있...   개뿔. 뛸 때마다 무거운 기모의 중력과 허리춤의 엉성함이 온몸을 잡아 끄는 것 같았다.













 준비 운동을 시작하자 다들 숫자에 맞춰 움직였다. 공을 들고 배 둘레를 돌리는가 하면 오른손 위에서 왼손 아래로 떨어트린 후 공을 낚아챘다.  


 공을 배 둘레에 돌릴 때 어쩐지 수월하다 싶었다. 어? 나 너무 잘하는데?

하지만 내가 잘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어 다른 분들을 관찰하자 역시 허리 돌림이 달랐다. 공을 돌리는 데 집중한 나머지 허리는 돌리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배 주위로 공을 돌리는 일은 운동이라기보다 공 닦기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 순간부터 공을 돌리며 허리를 돌려보려 했지만 두 개를 동시에 돌리는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부지런함이었다. 공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이어진 준비운동 역시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은 그런 시간이었다.



 이게 준비운동이라고?

준비 단계부터 이미 망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준비 운동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 본격적인 운동으로 들어갔다. 사다리 같은 도구를 펼치고 발재간을 빠르게 하면서 도구를 통과하는 스텝 훈련이었다. 나를 배려한 것인지 아니면 나 때문에 꼬여버릴 다른 분들을 고려한 것인지 다행히 선생님께서 나만을 위한 작은 도구를 따로 펼쳐주셨다.

 


   오른발을 먼저 사각형 안에 넣고 왼발을 빠르게 따라 넣고 왼발이 도착하는가 싶으면 오른발이 바로 오른쪽 밖으로 빠져나간다. 오른쪽 밖으로 빠져나간 것 같은 오른발이 땅에 닿았는가 싶게 스친 후 다시 사각형 안으로 들어가면 왼발이 다시 왼쪽 밖으로 빠져나간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 응? 방금 뭐가 지나갔나? 하고 눈을 꿈뻑이게 되었다. 일단 시작해 보자.  에라 모르겠다. 내 발이 내 발이 아닌 것 같았다. 축구 장에서 펼쳐지는 댄스 스텝.  우스운 꼴을 피할 길이 없었다.








스텝 훈련 후에 미니 게임이 시작되었다. 게임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경기장 밖에서 아이들의 경기를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그때마다 얼마나 답답했던가. 아이들을 향해 소리소리 지른 경력이 몇 년이던가.


 골대 안에 공을 넣어라, 상대의 공은 막아라.

 이 정도의 룰만으로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축구의 매력이다.


  골대와 골대 사이를 열심히 뛰었다. 이 세상에 공과 초록 바닥과 나만 존재하는 느낌. 하지만 공은 호락호락 내게 와주지 않았다. 끊임없이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앍. 같은 소리만이 경기장 안을 울렸다.  골키퍼를 할 때는 또 어떻고. 그 엉성하고 우스운 자세에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즐거웠다.

혼자 운동했다면 진작 드러누웠을 텐데 우리 팀의 구멍이 되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이는 시간들, 우리 팀의 골이 들어가자 함께 하이 파이브를 할 때 주고받는 그 환한 미소 같은 것들.










운동이 끝나고 다들 몸이 괜찮냐고 물어주셨다.  첫날에 토한 분도 있고 몸살은 디폴트라고 했다. 그런데 의외로 괜찮았다. 비록 엉성했으나 나 진짜 축구에 특화된 몸 아닌가? 하고 얼마간의 자만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저녁이 되었을 때 준비운동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운동을 한 자의 최후를 맛보아야 했다.                                      









내 인생 전반을 지배하는 단어는 서투름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삶을 살아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늘 의아했다. 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혼자 삶의 매뉴얼을 놓친 사람처럼 이렇게 삶의 매 순간 서투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알이 배긴 몸으로 이불이 만든 동굴 속에서 생각했다.

준비운동.

그래 그게 문제였던 거야.


 준비운동이 안 된 채로 매일을 맞이한  내 삶에 대해 생각했다. 어어어? 하는 사이 나를 넘어트린 채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말이다.


앞으로는 준비운동을 잘해보는 거야. 조금은 수월해질지도 몰라. 예습 같은 거, 선행 학습 같은 거 그런 걸 하는 삶이 되어보는 거지.


하지만 이내 공을 허리춤에 닦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준비운동마저 서투른 인간, 그게 바로 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체험 수업 이후 계속 수업을 할 것인지 묻는  친구 어머님과 선생님의 질문 앞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축구... 계속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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