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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과삶 Mar 21. 2020

이상과 현실, 당신의 선택은?

삶을 누리기 위해 일이 필요하고, 일 덕분에 삶이 빛난다

10년 전 누군가 자신의 인생을 바꾼 소설이라고 《달과 6펜스》를 소개했다. 구매하고 10년을 묵혔다. 내 인생이 바뀔까 무서워 읽지 못한 것일까? 그저 그런 자기계발서 같은 소설로 치부해 버린 어리석음일까? 이제라도 읽게 되어 다행이다. 인생 소설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5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몰입해서 읽었다. 이렇게 흥미진진하면서도 상상력이 자극되고 사유가 깊어지는 소설이 또 있을까? 고전은 다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나의 선입관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외국책을 읽으면 번역이 거슬려 집중하기 어려운데 민음사의 이 소설은 번역서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술술 읽혔다. 


이 소설에서는 후기 인상파 화가 고갱을 모델로 한 스트릭랜드라는 예술가의 극적인 삶을 그려낸다. 고갱의 그림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른 이미지가 있다. 인터넷으로 그림을 찾아 그 그림이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지는 않다. 글로 떠올린 이미지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랄까.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라는 소설 속 더크 스트로브의 말처럼 이 책은 우리가 가진 지식, 감수성, 상상력으로 작가의 멜로디를 들려준다. 



세 여인의 사랑


스트릭랜드 주변에는 그를 사랑한 세 여인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아내다. 겉으로는 화목한 듯 가족을 꾸리고 살지만, 정작 부부는 서로가 원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쇼윈도 부부처럼 살다가 어느 날 스트릭랜드는 부인을 버리고 자신의 이상을 찾아 나선다. 블란치 스트로브는 불같은 사랑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스트릭랜드와 사랑에 빠질 것이라는 운명을 느끼고 남편 더크 스트로브가 스트릭랜드를 집에 들이자는 제안에 반대했다. 결국 스트릭랜드와 사랑하게 되지만 그의 배신으로 자살에 이르는 사랑밖에 모르는 비극의 여인이다. 사랑에 모든 것을 버리는 철없는 사랑의 상징이랄까? 스트릭랜드가 죽을 때까지 조용히 그 곁을 지킨 아타, 그녀는 사랑은 모성애에 가깝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나병에 걸린 그를 떠나지 않고 헌신적으로 돌봤다. 과연 스트릭랜드는 그녀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얻고 안정을 찾았을까?


작품 해설에서 블란치 스트로브를 육체적 관능만을 추구했다고 언급하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블란치 스트로브에 관한 내용이 많지 않아 알 수는 없다. 세 여인 중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했지만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녀는 왜 스트릭랜드를 사랑했을까? 왜 자살을 감행했을까?



육체의 옷을 걸칠 수 있는 영혼의 휴식처


"그는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둥근 구멍에 모난 못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곳에는 별의별 구멍이 다 있어, 제 구멍을 찾지 못하는 못은 없었다. 여기서라고 해서 그가 더 점잖아졌다거나, 이기적인 성격과 무지막지한 성질이 더 줄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환경이 그에게 유리해졌을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만 살았더라면 그도 다른 사람보다 더 고약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와서야 그는 고향 사람들에게서는 기대도 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았던 것, 곧 동정을 얻었다."

-《달과 6펜스》 중에서


우리는 정말 다양한 모양의 못인데 우리에게 맞는 구멍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건 아닐까? 스트릭랜드가 정착한 타이티섬처럼 영혼의 안식처, 자신의 모양과 빛깔에 맞는 환경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릭랜드는 변하지 않았지만, 환경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다르게 받아들인다. 비록 불타서 사라지긴 했지만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그림을 완성했다.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 고향처럼 편하게 느껴진다는 동료가 있다. 아직까지 그곳에 정착을 못 하지만 매년 방문해서 안식을 얻는다고 했다. 스트릭랜드에게는 타이티섬이 그런 곳이다. 죽기 전에 영혼이 쉴 수 있는 자신만의 환경을 찾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 달과 6펜스


이 책의 제목이 달과 6펜스인 이유가 "달은 삶에 대한 지향이고 6펜스는 세속적 가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트릭랜드는 6센트라는 현실을 버리고 미를 창조하려는 열정, 즉 달만 추구하며 살았다. 이 책으로 인생을 바꾸었다는 지인도 다니던 현실의 회사를 그만두고 본인이 진심으로 원하는 이상적인 일을 시작했다. 


이상을 위해 현실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이상이 꼭 그렇게 거창해야 할까? 스트릭랜드처럼 처자식을 버려야만 하는 걸까? 달이 삶이라면 6펜스는 일이다. 삶을 누리기 위해 일이 필요하고, 일 덕분에 삶이 빛난다. 삶만 누리거나 일만 하는 인생만큼 지루한 삶이 또 있을까? 5일 동안 열심히 일했기에 2일 동안의 주말이 더 소중하다. 일과 삶을 둘 다 누려야 한다. 둘 간의 조화와 통합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 믿는다. 


이번 주말에 미술관에 갈 예정이다. 서머싯 몸처럼 생생한 묘사를 표현하진 못하겠지만 내 마음속에서 예술가의 멜로디가 울려 퍼지길 기대한다.


(예전에 써놓은 글이라.... 정말 코로나 문제가 빨리 해결되어 미술관에 가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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