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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하라티 Oct 12. 2023

과일 좀 따보셨나요?

호주 외노자의 길


이번 여름, 잠깐 한국에 돌아왔을 때, 여러 지인을 만나면서 그중에는 타지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한 후, 영주권까지 딴 친구들도 있었다. 한 친구는 한국에서 잠깐 몇 년 지내며, 영주권을 따놨지만 다시 돌아갈지 말지 고민을 한다 했다. 나는 그 친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디에서 지내기로 결정하든 그 친구의 행복을 응원했다. 그가 한참 동안 직업과 그에 따른 수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호주에서의 삶,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느껴서 좋았던 자유로움이 좋았던 나. 그녀에게 그래도 한국보다 직업 귀천 없이 어떤 일을 해도 시급이 한국보다 높으니까 돈을 모으기에도 좋고, 자연 속에서 살면 좋지 않냐고 물었다.


그녀는 타지에서 외노자로 고생하며 일할 바에, 한국에서 ‘선생님’으로 불리고 싶다 했다.


두 달 동안 있는 동안 한국 동양화를 배워보고 싶어서, 매주 수업을 들으러 갔는데, 모두가 서로를 누구누구 ’ 선생님, 쌤’ 이라고 부르신다. 영월에 여행을 갔다. 잠깐 투어를 받고 있는데, 기사님께서 나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시는데, 너무나 어색했다. 5년 만에 돌아온 나는, 누군가의 선생님이 되었다.

하긴, 한국에 들어오니 ‘선생님’ 소리를 참 많이 듣는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나는 교사인 선생님만이 진짜 ‘선생님’인 줄 알았는데, 최근 한국에서는 나도 선생님이 되었다. 학생이라고 불려지기에는 이제 너무 부쩍 나이 들어버린 선생님이 돼버린 걸까.


한국에서 좋은 시간을 보낸 후, 나는 장의 가족이 있는 프랑스를 방문했다. 운이 좋게 인생 첫 유럽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중 호주를 가기 전부터 한국에서 알고 지낸 네덜란드 친구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알고 있다. 사실은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호주 워킹홀리데이 이야기를 해주었고, 우리 둘은 시드니에서 다시 재회해 함께 지낸 적이 있다. 2020년 그녀는 코로나로, 호주를 떠났고 지금은 그녀가 공부하고 싶어 하던 생물학 분야를 공부하고 있다 한다.

우리는 호주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런 그녀가 나에게 호주에서 살고 싶냐고, 영주권을 딸 생각은 없냐고 물어봤다. 많이들 묻는 질문이었다. 4년 정도 살았으니 말이다. 아직까지 나는 어디에서 살지 정하 지를 못했다. 호주도 편하지만, 아직 다른 나라에서도 지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 그녀는 나에게 혹시 호주에서 일하는 일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호주에서 나는 외국인 노동자다.


워킹홀리데이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 경험, 저 경험, 한국에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들을 배우고, 하게 된다. 코로나 시국으로 호주 정부로부터 나는 어쩌다 예상치 못한 추가적인 비자를 받을 수 있었고, 대략 4년 동안 호주에서 지내며 ‘외국인 노동자’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탐색해 갔다.  


농장에서의 일은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추가적으로 받으려면, 일수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시작해야만 했다. 의무적이지만, 새로운 일이라는 것은 나에게 호기심과 흥미를 가져다줬다. 작년에는 트럭 운전수가 곡식류를 가지고 오면, 이를 큰 창고에 쌓아두는 일을 관리하면서, 손에 굳은살이 배길 정도로 인생 처음 삽질도 해보았다.


농업분야에서 따로 자격증이 없던 나는 주로 무언가를 ‘따기’와 '수확하기'에 바빴다. 오렌지, 포도, 블루베리, 사과 따기를 해봤고, 가끔은 채소 농장에서 일하며 브로콜리니를 자르거나, 브로콜리니를 고무줄로 묶어보거나, 당근을 캐고, 셀러리를 자르기도 해 보았다.




육체적으로 조금은 고되지만, 일이 끝난 후 샤워를 하면 밀려오는 졸음. 내 몸을 써보며 일을 하는 것에 행복함을 느끼기도 했다.

고된 일 후, 직접 따서 짠 오렌지 주스.


하지만 뭐든 자꾸 쓰고, 이용하면, 녹슬고 고장이 나기도 한다. 내 몸도 가끔은 아프고, 녹슨 적이 많다.


피부가 참 노화되었다. 아무리 선크림을 발라도 벗어날 수 없는 호주 오존의 구멍. 절대 타지 않을 것 같던 나의 피부는 갈색 빛깔을 띄었고, 주근깨와 잡티가 많이 생겼다. 한때는 여드름 큰 게 하나 얼굴에 나면 바로 피부과 가서 염증주사를 받았던 나. 어머니는 처음에 조금 속상해하신 것 같다. 뽀얗게 자란 딸이 갑자기 씨꺼멓게 되었으니 말이다. 한국에 왔을 때, 친한 후배는 내 손을 바라보고 지긋이 잡으며 말한다. 언니 참 고생했구나. 그래도 내 손이 참 좋다. 젊고 투명한 피부는 아니지만, 잘 가꾸어진 부드러운 도시 여자의 손은 아니지만, 얼룩덜룩한 나의 손에는 경험과 기억, 수많은 감정들을 지니고 있다.



오렌지 피킹을 한 적이 있다. 그 시기는 코로나가 심한 때여서, 어떤 일이든 해야겠다 싶어서 잡은 일이다. 다른 친구들 중에서 오렌지로 돈을 많이 번 경우가 주위에 없을 정도로, 나 또한 오렌지 피킹과는 영 좋지 않았다. 나무도 큰 편이라, 사다리를 항상 짊어지고 일한다. 그리고 오렌지가 참 무겁다 생각보다. 캥거루 가방이라고 하는 큰 주머니 가방을 앞에다 메고 일을 한다. 어떤 오렌지는(주로 주스용으로) 정말 내 얼굴만 하고, 심심하면 오렌지 공 던지기 놀이도 가능하다.


힘든 강도임에도 이는 피스레이트 Piece Rate 여서, 킬로당 얼마를 받는 식이다. 지금 호주에서는 법이 바뀌어 최저 시급을 보장해 주지만, 당시에는 이마저도 없어서 항상 허탕만 하고 집에 돌아왔다. 날이 너무 추운데, 따로 난방이 없어 작은 온풍기로 몸을 녹여보지만, 그 앞만 잠시 따뜻하다. 일주일 째 되었던가, 화장실문을 열렸는데 문을 못 열겠다. 큰 공만 한 오렌지를 딸 때마다 돌리면서 따다 보니, 나의 손목에 무리가 되었나 보다.


농장주가 제공해 주는 집에서 지내던 우리는 어느 날 농장주로부터 통보를 듣는다. 코로나 때문에 격리를 해야 되는데, 다른 주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의 셰어하우스를 비워야 한다고. 이미 5명이 넘게 지내고 있는 다른 집에 총 6명이던 우리들을 넘겼다. 울화통이 터지고 화가 났다. 이렇게 얼마 되지도 않은 수입에, 최저의 편한 환경에 있지 않은 나 자신에게 미안했다. 나의 손목은 소중했기에, 말도 안 되는 대우의 일을 당장 때려치우기로 했다. 억울했던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호주의 노동부인 Fair work에 전화했다. 그리고 상담에서 전해 들은 말은, 그런 집에서 왜 지내냐며 당장 다른 집을 알아보라는 충고가 다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농장주를 보고하는 게 다였다.


한국에서 지내는 외국인 노동자들, 아니 이 땅의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나는 얼마나 무지했던가.

이 땅에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분들께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내 일이 남의 일인 듯 싸워주는 사람들이 있어, 이 세상이 돌아가고 나아간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먹는 기본적인 채소와 과일들, 그 기본 수확과정에 참여하니까 알게 된 점은 엄청난 농약이 뿌려진다는 것. 무턱대고 먹다가 배가 탈이 난 적이 많다. 특히 블루베리는 세척해서 가게에 나오는 줄 알았지만, 물에 닿으면 사실 색이 까맣게 변하기 때문에 절대 물에 닿을 일이 없다.


 

그래도 내가 해본 과일 따기 일 중에 최고는 블루베리이다. 처음에는 손이 빨라야 돼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야 손이 익혀진다. 그 과정이 사실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나 같은 경우에는 시간이 좀 걸려 몇 주가 걸린 것 같다.


뭐든지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지겹고 고된 싸움이 된다. 장과 마주 보고 짝꿍으로 일을 하면서 장이 나보다 빨리 블루베리를 따면 괜히 얄미워 질투했다. 그리고 비교하면서 별거 아닌 걸로 속상해하기. 그런데 이도 과정이다. 어디 세상이, 아니면 누가 나를 기다려주는가. 결국에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결과와 과정에 비교하지 말고 행복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잘하고 있다. 내 마음대로 안된다고 속상해하고, 앉아서 울고 있으면 누가 해결해주지 않는다 말이다.


손이 빨라지면, 블루베리도 종류별로 먹으면서, 돈도 버는 일이 벌어진다.



아마 이도 중독이었던 것 같다. 블루베리 단맛의 중독도 중독이지만, 내가 일한 만큼 내가 몸을 움직인 만큼 수익이 들어온다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 말이다. 한국에서 지내면서 단 한 번도 나의 신체 최대치를 사용하여 수익을 벌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만큼 노력해서 버는, 이는 스포츠와도 같았다. 블루베리 수확기간은 짧아서 장기간 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즐거운 땀을 내며 일한 적은 처음이었다. 가끔 블루베리를 가져올 기회가 있으면, 블루베리 잼을, 블루베리 케이크, 아침에 요구르트와 블루베리, 블루베리 스무디, 참 건강한 삶이다.


믿거나 말거나, 호주에서 돌아온 지 4년 만에 찾은 단골 동네 안경점. 시력이 4년 사이 좋아졌다고 한다. 이는 블루베리와 함께한 건강한 삶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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