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는 동안 운이 좋게도,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우리를 도와주고, 믿어주고, 피만큼 진한 나의 가족을 만났다. 나이가 들면서, 결국에는 내가 대단치 않음을,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가르침을 얻는다. 그들의 사랑으로 작은 관심이지만 쉽지 않은 관심으로 내 집시스러운 삶은 굉장히 윤택해진 적이 많다. 아니, 나의 삶이 나를 그들의 사랑으로 이끌어주었는지는 모른다.
키아마 KIAMA
우리의 첫 번째 밴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마 인생 처음으로 큰 사고가 날 것 같다는 느낌, 위기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차는 꽤나 오래된 밴인데, 이 밴으로 우리는 타즈매니아에서 남호주에서부터 Great ocean road를 지나 우리는 블루베리 마을, 호주의 동쪽 해안가 쪽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출발한 곳으로부터 대략 1700km를 달려왔다.
아마 시드니에 다 와가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어느덧 산속 안에 있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가끔 이상한 계란 썩은 냄새, 유황 냄새가 나길래 우리는 아, 여기 주변에 온천이 있나 보다 하고 있었다. 그러던 갑자기 차 와이퍼는 자기 멋대로 움직이며 귀신 들린 차 마냥 멈추질 않는다. 더불어 차의 라이트도 불이 번쩍번쩍하며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며, 우리는 꽤나 놀라서 어쩔 줄 몰라했지만 겨우 차를 갓길에 댈 수 있었다. 굽이진 길이고, 점점 날이 어두워지고 있는 중이어서 겁이 났다. 뒤에 우리 차를 보고 멈춰 선 차들이 있었다. 친절한 남성 두 분이 각자 차에서 내려 어찌 된 상황이냐며 물어봐주었다.
우리는 차 엔진을 확인하기 위해 조심히 보닛을 열었고, 배터리에는 물방울이 보글보글 끓어 올라와 있었다. 차에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 처음에 맡았던 유황냄새는 온천이 아니라, 우리 배터리에서 나던 냄새였다. 나는 운전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차에 대해 정말 무지하기 때문에 겁부터 잔뜩 났지만, 뒤에서 보고 확인하러 온 두 분이 도우러 와주신 것에 고마웠다. 생각해 보면, 당시에 이 두 분을 제외하고서도 많은 분들이 차를 잠깐 멈추고, 창문을 열어 어떤 상황인지 물어봤다. 이게 호주 오지 AUSSIE의 인심이다.
그중 한 분은 차에 툴박스가 있어서 다행히 안전하게 배터리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더욱 다행이었던 점은 우리에게 여분 배터리가 있었다는 것, 하지만 배터리를 바꾸었지만 미동이다. 이미 더 큰 문제가 있던 상황이었고, 차는 더 이상 깨어나지 않았다. 결국 두 분의 도움으로 가까운 동네, 견인차를 불렀고 우리는 견인차 아저씨와 함께 자동차 정비소로 향했다. 이미 어둑한 밤이라, 영업은 이미 끝났다. 우리는 정비소 앞에서 주차된 상태로 그래도 밴은 우리의 집과 같으므로,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화장실도 근처에 있었고, 꽤나 안락한 느낌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동네는 해안가 아름다운 마을, 키아마 KIAMA였다.
견인차가 오기 전에 도와주신 두 분 중에서 한 분은 우리와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본인이 이 마을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도착하면 연락을 하라고 했다. 우리는 그의 낯선 이에 향한 관심, 도움에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문자를 남겼더니, 그는 어느 정비소냐며 잠시 찾아온다고 한다. 얼마 후 정비소에 도착한 그는, 무언가 잔뜩 담겨있는 종이백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다. 본인과 본인 아내가 주는 선물이라며 내민 라벤더가 묶여있는 종이백에는 비건 카레와 밥, 빵, 꿀, 라벤더 오일, 직접 만드신 콤부차, 그리고 성경책이 있었다. 성경책에는 장의 영어식 이름과도 같은, 존 JOHN이 적혀있는 요한복음에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애쉬 Ash라고 했다.
다음날, 애쉬가 말해준 대로 정비소는 믿음직스러운 절차로 우리를 대우했고, 며칠이 걸릴 거라고 문제는 해드 게스켓 HEAD GASKET이란다. 당시 이 단어를 정비소에서 듣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절대 익숙해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처음 들은 부품의 이름으로 (사실, 차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엔진의 실린더 블록과 실린더 헤드 사이에 들어가는 얇은 금속판이라는데, 무척 중요한 부분이고, 부품을 주문해 놓은 상태라 며칠이 걸린다 했다. 우리의 사정을 알고 있던 정비소에서는 차가 고쳐질 때까지 정비소 앞에서 자고 지내도 된다 했다. 행운이었다.
애쉬 가족은 우리를 그들의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애쉬는 우리를 데리러 와줬고, 도착한 그의 집에는 그의 아름다운 아내 타니카 TANIKA와 세 명의 아이들 샬로 Charlo, 디미 Dymi, 핀 Finn , 그리고 토끼 가족이 있었다. 세 명의 아이들은 낯선 이인 우리에게 스스럼없이 대해주었고, 그들의 호기심과 함께 여러 질문들이 오갔다. 호주를 이제 막 잔뜩 돌아다니고 온 우리는 그들에게 멋진 모험가였다. 그리고 우리는 저녁 식사 전 애쉬 가족 모두와 함께, 손을 서로 잡고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둘 다 따로 종교는 없는 편이다. 그 당시에도 말이다. 예전에는 종교에 굉장히 예민하게 군 적이 있었다. 본인의 종교만을 생각하며 타인은 배려하지 않던 사람들을 만났고, 기독교 신자 중에 그런 경우가 많아서, 이에 대한 나의 방어적인 편견을 쌓아 올렸던 적이 있다.
애쉬 가족을 보면 종교의 신앙과 종교의 철학을 본인들 삶에 도입하여 직접 그들의 삶으로 종교를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낯선 여행자들에게 기꺼이 집 저녁식사에 초대를, 여행에 지친 우리들에게 따뜻한 샤워를, 그리고 사랑으로 우리를 맞이하였다. 이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갑자기 기독교 신자로 바뀌었다는 전말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족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며 나 또한 그들의 신앙을 따스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 나를 위해, 우리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 기도 해준다는 것이 이렇게나 귀한 감사함이라는 것을.
떠나는 날, 헤드 게스캣을 고치는 값이 비싸다는 것은 인터넷을 검색해서 알고는 있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사실 차 고장의 주원인은 남호주에서 있었을 때 정비소에서 대충 고쳤던 차의 부품, 새 알터네이터가 사실 우리 차에 맞지 않았던 것이고, 이는 전 정비공의 큰 실수임을 알게 되어 전 정비소에서 대부분의 보상을 해주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참 무서운 것이다. 정비공의 실수로 우리는 큰 사고를 날 뻔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남은 비용을 지불하려던 마지막 날, 정비소에서 이미 지불이 다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애쉬 가족이었다. 우리는 돈이 부족해서 이런 삶의 방식을 지내는 것도 아닌데, 우리의 안전한 여행을 응원하는 마음에서 도왔다고 한다. 특별하지 않은 우리를, 멋진 탐험가로 대했던 애쉬의 아이들. 편안한 집에서 떠나 전국을 떠도는 우리를 응원해 주는 또 하나의 가족이 생겨 떠날 때 마음이 든든했다.
2달 전, 암스테르담 홍등가 앞에서 장이랑 갑자기 말도 안 되는 말다툼을 하고 있던 적이 있다. 누군가 지나가면서 아마 나한테 들으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테지만 나한테 말한 것처럼 들렸다.
“At the end it’s love, right?”
결국에는 사랑이다. 사랑이 우리를 성장하고, 나아가게 한다.
우리는 아직도 애쉬 가족과 종종 연락을 한다. 특히나 아이들 생일과 장의 생일, 애쉬의 생일, 나의 생일 모두 비슷하게 엮여 있어서 생일 축하 할 때가 되면 또 마침 이들 가족이 생각난다. 그들에게 한국에서 온 이모, 프랑스에서 온 삼촌이 되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