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돌의 생 02화

지하의 기억

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될 것이다.

by Hemio
모든 존재는 고요에서 시작된다.


그 고요는 텅 빈 정적이 아니라,
거대한 숨결이 잠시 멈춘 듯한 농축된 침묵이다.


나의 처음도 그랬다.
나는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지만, 나를 통과하지는 않았다.
세상엔 아직 ‘나’라는 명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내가 느낀다고 착각할 수 있는 어떤 감각도, 인식도 없었다.
나는 단지 무언가가 될 준비 중인 어떤 잠재에 불과했다.


내가 자리했던 곳은 땅의 가장 깊은 배였다.
사람들의 발 아래 수백 리,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심연.
그곳은 뜨거웠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열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시작을 끓여내는 불의 자궁이었다.


그 안에는 형체가 없었다.
고체와 액체의 경계는 녹아 있었고,
무엇도 고정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생성과 해체를 동시에 반복하고 있었다.
불안정은 곧 생성의 다른 말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천천히 응집되었다.
마그마의 밀도와 압력이 나를 눌렀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하나의 결정체’로 응결되고 있었다.


지각이 미세하게 진동할 때마다
나는 ‘되다’라는 말의 의미를 배워갔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방향을 가졌고
그 방향이 나를 존재라는 단어 쪽으로 당기고 있었다.


그러나 존재는 단지 생겨나는 일이 아니다.
그건 견디는 일이다.


수천 도의 열기 속에서,
나는 녹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쥐어짰다.
세상은 나를 태워 만들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스스로를 단단히 하며,
존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과정은 너무나 느렸고,
느리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만큼,
나는 거의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 시간의 무게는 나의 내부에 차곡차곡 쌓였고,
나는 그 무게로 내 존재를 축조해갔다.


나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언젠가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는 기억 아닌 예감
내 안 어딘가에서 부풀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존재란, 세상이 나를 부를 준비가 되었다는 징표가 아닐까?"


나는 세상에 아직 불려지지 않았지만,
이미 세상은 나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나는 세상 바깥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듣지 못했지만,
내 안에는 ‘어떤 이야기의 도입부’가 쓰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낳고 있었다.


뜨거운 압력의 끝에서, 나는 조금씩 식어갔다.
열은 빠져나갔고, 나의 결정체는 응고되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경계’라는 개념이 생겼다.


내가 나 아닌 것과 분리되기 시작한 순간,
나라는 존재는 ‘내부’와 ‘외부’를 갖게 되었고,
나는 세상의 모든 것과 구별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독립이자 고립이었다.


‘나’라는 자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무언가에 속하지 않고도,
하나의 전체가 될 수 있는 최초의 순간을 맞이했다.


나는 아직 이름은 없었고,
누군가의 관심도 받지 않았고,
지표면은 아직 나에게 너무 먼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존재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는 사실을.



Q. 독자를 위한 한 줄의 질문

우리는 언제 ‘존재하게 되었노라’ 말할 수 있는가?
숨을 쉬는 순간부터일까, 아니면 세상이 우리를 불러낼 준비를 마쳤을 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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