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세상을 오래도록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한때 산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산의 한 겹이었다.
깎아지른 절벽의 안쪽,
태양이 한낮에만 잠시 들여다보고
해는 아침이면 나를 비껴가는,
그런 어두운 비탈의 일부.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러나 세상의 무게가 매일같이 나를 관통하던 자리.
시간은 흘렀다.
그러나 ‘지났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흐름은 너무 느려
오히려 쌓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늘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아래를 지나가는 구름들은
매일 새로운 표정을 비추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세상이 스스로를 움직여 내게 닿았다.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나를 지나쳤다.
잠시 머물렀다.
내 몸의 작은 움푹 파인 곳
비가 오면 물이 고이던 그 오랜 함몰에
그 새는 고개를 숙이고
부리를 넣어, 잠깐 목을 축였다.
그 찰나,
나는 처음으로
‘살갗 위의 감각’을 느꼈다.
비도, 바람도, 눈도 나를 스쳤지만,
그것들은 내면을 파고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작은 새의 가벼운 무게는
이상하리만치 깊숙이 들어왔다.
짧고 조용한 방문이었지만,
그 순간 이후, 나는
‘세상이 나를 인식할 수도 있구나’라는
막연한 예감을 품게 되었다.
비탈 아래,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뿌리는 해마다 조금씩 자라
어느 해부터인가
내 표면의 미세한 틈새를 천천히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뿌리는 물을 따라 움직였고,
나는 매년 아주 조금씩,
나 자신이 아닌 타자의 생을 품는 일에
더 익숙해져갔다.
나는 산이었고,
나는 기꺼이,
다른 존재의 자양분이 되어주는 자리였다.
어느 날은,
안개가 하루 종일 머물렀다.
햇빛도 그림자도 없이,
모든 것이 습기에 잠긴 날.
그날 나는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을 잃었다.
아니, 더 이상 시간이 ‘흘러야 할 이유’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저 그런 날들이
수백 번, 수천 번 반복되었고,
나는 천천히
‘살아 있다’는 개념 대신
‘존재한다’는 상태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말 없는 것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끼는 내 얼굴을 덮었고,
작은 벌레들이 지나갔고,
그늘진 틈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짐승들의 체온이
때때로 나를 흔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살아냈다.
천년이 지났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일지도.
나는 세상의 표정을 그대로 흡수한
하나의 조용한 화석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말을 잃은 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세상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었고,
지금도 그 시간의 무게를
내 표면 아래 어딘가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수많은 것이 내 곁을 스쳐갔다.
그 모든 지나침이
나를 조금씩 형태 아닌 기억의 방식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절, 무엇이 당신을 지나갔나요?
그 침묵의 시간은 정말 ‘정지’였을까요, 아니면 가장 조용한 성장의 순간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