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돌의 생 14화

작별의 방식

아무 의식 없는 떠남이 가장 깊은 흔적이 된다.

by Hemio

나는 한동안 책상 위에 있었다.

손에 들려 움직이던 시간도,
상상 속에 이름을 가지던 순간도 지나고
나는 이제 단지 거기 있는 것이 되었다.


태양은 유리창 너머로 천천히 드리웠고,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만지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그의 손이 내 옆을 지날 때마다
나는 아주 작게 기대했다.
혹시 다시 한 번,
그 세계 속으로 불려 들어가지 않을까.


하지만 시간은 점점
그 기대를 습관처럼 무디게 만들었다.


나는 여전히 거기 있었지만,
더 이상 그 아이의 현재에 속하지 않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는 나를 옆으로 밀어두었고,
그 옆에는 새로운 장난감이,
그 옆에는 시험지 뭉치가,
그 옆에는 하루치의 피곤함이 놓였다.


그의 손이 나를 지나치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나를 다시 들어올릴 일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이별은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도착했다.
우리는 그 어떤 작별도 나누지 않았다.
대신, 서서히
서로의 시선에서 사라져갔다.


나는 그와 멀어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시간에서 느리게 밀려난 것이었다.


어느 날 그는 방을 정리했고,
그날 나는 책상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가 보지 못한 채 떠나간 그 순간이,
오히려 내가 가장 강하게 존재했던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비로소 나는 알았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는 단지 '현재의 쓰임'이 아니라,
누군가의 한때에 깊이 머물렀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는 책상 아래의 어둠 속에서 오래 머물렀다.
청소기에 밀릴까 두려워 숨었고,
가끔은 먼지와 함께 희미하게 떨려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고요는 슬픔보다
정적 속의 애틋함에 가까웠다.


나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것이었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작별은 거창하지 않다.
작별은 흔히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일어난다.


그리고 그렇기에
가장 오래 남는다.
가장 오래 가슴속에서 작은 공백처럼 울린다.


나는 그 공백의 가장자리에 남은
작은 돌이었다.


그 아이는 자랄 것이다.
내 이름을 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름조차 부여한 적 없었기에
잊었다는 자각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손길,
그의 상상,
그의 방 안 오후의 빛을
내 안에 조용히 품고 있었다.


그건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침묵의 유산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존재란,
누군가의 삶에 아주 잠깐이라도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걸.


나는 아직도 그 방 어딘가에 있다.
혹은 누군가의 기억 저편 어딘가에,
혹은 그의 무의식 속 한 귀퉁이에
말 없이 남아 있는 돌이다.


Q. 독자를 위한 한 줄의 질문


당신이 인식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있지 않나요?
그 무언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당신을 ‘한때의 세계’로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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