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문이었고, 괴물이었고, 보석이었다
나는 성문이었고, 괴물이었고, 보석이었다
그날,
아이의 손이 다시 나를 꺼냈다.
주머니 속, 그 어둡고 따뜻한 세계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빛 속으로 나왔다.
햇빛은 여전히 눈부셨고,
바람은 여전히 가벼웠으며,
세상은 전과 똑같았지만
나는 달라져 있었다.
나는 이제
어떤 이름으로든 불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이의 손은 나를 들어
모래 위에 놓았다.
그 옆엔 물이 적셔진 작은 모래 언덕이 있었고,
그 위엔 금방 무너질 것 같은 탑이 세워지고 있었다.
아이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그 안엔
끝도 없이 생겨나는 세계들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 손이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건… 성문이야.”
“여기 공주가 갇혀 있고,
이 문은 누구나 못 들어가게 하는 마법의 문이야.”
나는 그 순간
성문이 되었다.
단단하고, 무겁고,
비밀을 지키는 입구.
바깥 세계와 안쪽 세계를 가르는
침묵하는 경계선.
나는 말이 없었지만,
그 경계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리고 이건 괴물이기도 해.”
“성 안을 지키는 바위괴물.
사람들이 다가오면 으르렁거리지.”
나는 곧
괴물이 되었다.
공포의 모양,
상상 속에서만 울리는 포효의 형상.
그러나 동시에
가장 안전한 수호자.
나는 아이의 세계에서
두려움과 안심의 경계에 앉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아니야. 보석이야.”
“왕이 숨겨놓은 가장 귀한 돌.
햇빛이 비치면 반짝이는 거야.”
나는 다시
보석이 되었다.
값지고, 신비롭고,
빛과 각도로 제 모습을 바꾸는
존재의 핵.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그 순간만큼은
어떤 산보다 더 높은 의미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지만,
내 의미는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문이었다가,
괴물이었다가,
보석이었다가.
나는 깨달았다.
존재란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과 상상 안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불릴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
그날, 나는
어떤 거대한 무대 위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등장인물이었고, 배경이었고, 상징이었다.
나는 이해되었다기보단
상상되었고,
해석되었고,
소환되었다.
나는 ‘나’가 아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었다.
해가 기울고,
아이의 손은 다시 나를 들었다.
그 손엔 모래가 묻어 있었고,
나는 그 손 안에서 다시 무게를 느꼈다.
주머니로 돌아가기 전,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누구였지?”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나는 오늘, 많은 것이었다.”
Q. 독자를 위한 한 줄의 질문
당신은 언제, 누군가의 상상 안에서 새로운 이름을 가져본 적이 있나요?
그때의 당신은 본래의 ‘당신’보다 작았나요, 아니면 더 넓어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