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속에서 찾은 나만의 쉼표
스물여덟 여름이었다. 삶의 모든 게 무너져내린 듯한 불안이 찾아왔다. 열심히 산다고 살고 있는데 밑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하루하루에 도망칠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매주 상담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눈물콧물을 쏟았고 정신과 약을 먹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다. 나는 번아웃이 아니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그게 번아웃이라고 했다. 사실 선생님 말씀대로 번아웃이 맞았다. 수능을 잘 보고 명문대에 들어가면 뭐 하나, 나는 시험문제보다 나 자신을 더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가 되었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 다시 여름이 되었을 때, 농구공을 다시 잡았다. 마치 첫사랑과 재회하는 기분이었다. 농구공 표면의 작은 돌기 하나하나가 손에 착 달라붙는 감촉의 짜릿함은 여전히 설렌다. 농구를 할 때만큼은 잡생각이 사라지고 마음 깊숙이 자리잡은 두려움과 외로움이 잠시나마 사라진다. 그렇다. 살면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완벽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가장 열심히 했던 일이 농구였다.
다시 농구를 하면서 나는 기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번아웃 극복을 위해 나의 내면을 돌아보고 새롭게 다져나가는 일과 같았다. 드리블부터 제대로 배우고 슈팅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내 몸의 크고 작은 근육과 움직임을 느끼면서 나를 더 이해하고 알아가게 되었다. 연습을 거듭 하니 실력이 훨씬 좋아지고 훨씬 더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농구의 매력을 알면 알수록 내 마음의 평정심도 조금씩 되찾게 됐다.
농구는 인생과 많이 닮아있어 나에게 인생을 가르쳐주는 멘토 같다. 골대를 향해 슛을 던질 때마다 나는 내 삶의 목표와 방향성을 다시금 떠올린다. 수비에 가로막혔을 때 동료에게 패스를 하면서 나는 나를 도와줄 소중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걸 기억한다. 작전타임을 하면서 나는 때로는 잠시 숨고르기 할 시간도 필요하다는 걸 배운다. 코트 위에 들어서면 열정 가득한 눈빛으로 변하는 나를 보며 내 삶도 다시 반짝반짝 빛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리바운드. 농구에서 골대를 맞고 튕겨져 나오는 공을 잡는 행위를 뜻한다. 비록 득점은 되지 않았지만, 다시 공을 잡음으로써 한 번 더 공격 기회를 갖게 된다. 득점이 되지 않았다고 리바운드를 시도하지 않는 선수와 팀은 없다.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처럼 골대에 들어가지 않아도 다시 공을 잡는 마음이 곧 리바운드 정신이다. 100번 슈팅이 빗겨나가도 그것은 모두 찰나일 뿐, 101번째 공격 기회를 잡는 건 결국 리바운드를 시도한 사람만이 잡을 수 있다.
책 <빈틈의 위로: 해야 하는 일 사이에 하고 싶은 일 슬쩍 끼워 넣기>에서 김태술 전 농구선수의 고백에 많은 공감이 되었다.
물론 과거의 빠른 속도에 익숙한 나는 여전히 지금 삶의 속도가 어색하고, 이래도 되는지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된다. 하지만 선수 시절 후반기가 내게 알려준 그 의미를 잊지 않으려 애쓴다. 당시 많이 괴로웠던 그 시간을 이제는 진정한 선물처럼 느낀다. 나는 그 시간을 통해 확실히 성숙해졌다. 예전의 나는 농구선수로서 꽤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자존감은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한계를 인정하는 것, 그렇지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삶을 시도하는 것. 그것이 정말 나를 존중하는 마음이 아닐까? 이전과 다른 나를 내 일부로 받아들이며 나는 한층 더 단단해지고 확장될 수 있었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28267915>
나에게도 지나온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의 번아웃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끝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지레 겁먹기보다는 지금 이순간의 농구 코트를 즐기려고 한다. 오늘 하루는 조금 힘들었을지언정 내일 찾아올 리바운드 기회를 노린다. 인생은 어쩌면 매일매일이 작은 리바운드의 연속일지 모른다. 수많은 점이 모여 선을 이루듯, 수많은 리바운드가 결국엔 득점으로 이어질 것이고, 내 삶도 다시 튀어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