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박적이고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술도 한 잔으로 끝내지 못하고 약을 할 때도 한 번 하고 말지 못해요. 안경과 차를 구입할 때도 하나로 그치지 않죠. 원래부터 그런 사람입니다.
엘튼 존
엘튼 존 전기를 쓴 데이비드 버클리는 1980년대 후반, 저 천재 음악가가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고 했다.
실제 엘튼은 한동안 "코카인을 곁에 끼고" 산 데다 폭식증도 겪었다.
거기에 악의적 유언비어를 퍼뜨린 타블로이드 신문 『선The Sun』과의 소송전은 정말이지 엘튼을 끝장낼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백기를 든 쪽은 『선』이었고, 엘튼 존은 소송 비용과 100만 파운드를 받아 모두 기부한 뒤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오늘 꺼낸 《Sleeping with the Past》는 그 혼돈의 시절 엘튼이 남긴 기적 같은 앨범이다.
팝 팬이라면 알다시피 그의 전성기는 70년대.
엘튼은 그 전성기를 연장시키고 싶었던 듯 87년 한 해만 뺀 나머지 80년대 모든 연도에 앨범을 냈다.
연이은 범작들로 언뜻 그의 전성기는 저무는 듯 보였지만,
고수의 감각이란 게 또 그리 쉽게 무너질 리는 없었다.
엘튼은 <Durban Deep>이라는 곡에 의외의 레게를 끌어들이며 작품 시작부터 듣는 사람들을 도발했다.
그리고 <Club at the End of the Street>에선 오티스 레딩과 마빈 게이를 언급하는데,
그건 이 앨범의 지향점이기도 한 옛 소울soul의 영광을 상징하는 장치였다.
무엇보다 이 앨범엔 <Sacrifice>가 있다.
결혼 생활의 신뢰 문제를 다룬 이 히트곡의 압도적 온기는
단호한 드럼 톤을 앞세운 <Healing Hands>의 가사 마냥 당시 엘튼이 통과 중이던 어둠 끝 빛처럼 들렸다.
처음엔 영국에서 55위, 미국에서 18위에 그쳤던 곡이지만
이듬해 <Healing Hands>와 묶어 재발매해 영국 차트 1위에 올랐다. 엘튼 존 싱글이 기록한 첫 영국 차트 점령이었다.
그렇게 5주 동안 60만 장이 넘게 팔린 저 싱글 덕분에 《Sleeping with the Past》도 덩달아 같은 나라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으니, 이는 엘튼이 영국에서 거둔 다섯 번째 정상이다.
윤상에게 박창학이 있듯
엘튼 존에겐 버니 토핀이 있다.
그는 엘튼 존의 바깥에서 엘튼 존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존재였다.
버니는 엘튼의 생각이요 영혼이었다.
그런 버니의 말에 따르면 <Sacrifice>는 사랑과 헌신을 다룬 <Your Song>의 '자매곡'이다.
요즘처럼 겨울이 지척인 때 이 곡은 더할 나위 없는 포근함을 준다.
다만 이 노래를 발표하고 1년 뒤 알코올 중독과 약물 의존, 섭식 장애가 재차 엘튼을 덮친 일은
불안한 노랫말과 편안한 음악 사이 긴장이 현실로 침투한 얄궂은 역설이었다.
모든 예술 작품은 본인이 직접 감상한 뒤 판단하는 게 좋다.
전문가 비평을 비롯한 남의 의견은 참고만 하자.
남의 판단만 믿고 거른 작품이 어쩌면 당신의 인생작이 될 수도 있다.
올뮤직가이드allmusic.com가 별 다섯 만점에 두 개만 준 이 앨범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