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은 위험하다.
모 아니면 도라는 이분법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들면 세상이 단순해지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본인이 단순해진다.
다른 '빡센' 메탈 밴드들과 비교하며 본 조비가 덜 빡세다고 얕보는 사람들이 이 부류에 든다.
아메리칸 록의 정점 또는 결정체인 이 위대한 밴드를 고작 덜 헤비하다는 까닭으로, 메탈 밴드로선 너무 달콤하다는 이유로 가볍게 보는 것은 일면 유치하기까지 하다.
오늘 꺼낸 《Keep the Faith》는 내가 중학생 때 나온 앨범이다.
그때만 해도 새 앨범이 나오면 라디오에서 따로 광고하던 시절이라
"본 조비의 새 앨범 《Keep the Faith》! 폴뤼그뢤Polygram" 하던 성우의 목소리는 지금도 생생하다.
발매일은 1992년 11월 3일.
바야흐로 마이클 잭슨을 빌보드 정상에서 끌어내린 커트 코베인이 멀쩡히 살아 있던 그런지Grunge의 시대였다.
여기서도 현상을 둘로만 나눠 보는 사람들은 "헤비메탈은 죽었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리곤 하는데,
90년대는 80년대의 연장이므로, 비록 스타일은 바뀌었을지언정 메탈 밴드들의 인기는 80년대 못지않았다.
빌보드 정상에 오른 메탈리카의 블랙 앨범과 판테라의 《Far Beyond Driven》을 비롯해 주다스 프리스트의 《Painkiller》, 오지 오스본 밴드의 《No More Tears》, 메가데스의 양대 명반으로 치는 《Rust in Peace》와 《Countdown to Extinction》, 슬레이어의 또 다른 걸작 《Seasons in the Abyss》가 모두 90년대에 나왔고, 헤비메탈의 짜릿한 변종이었던 뉴 메탈과 데스/블랙 메탈도 다 90년대에 등장했거나 가장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90년대에 헤비메탈은 90년대를 집어삼킨 그런지 만큼이나 멀쩡했다.
메탈 팬들이 얕봤다손 쳐도 데뷔 초기 래트Ratt를 표방하며 글램 메탈 밴드로 분류, 자처해 온 본 조비 역시 90년대에 변함없는 지명도를 누렸다.
다만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이들이 계속 음악을 해나가기 위해선 어떤 전환점은 필요해 보였다.
실제 이들은 《New Jersey》를 내고 17개월 동안 치른 237회 공연 뒤 완전히 방전된 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마지막 멕시코 공연을 마치고 멤버들은 서로 인사도 없이 비행기를 타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분위기를 놓칠 리 없는 언론이 얼마 뒤 존 본 조비의 발언으로 포장된 밴드 해체설을 조금씩 퍼뜨리기 시작했다. 마침 존이 《Blaze of Glory》로 솔로 데뷔까지 한 터라 밴드 본 조비의 미래는 더 불투명해 보였다. 한동안 존과 연락을 끊고 지낸 멤버들은 당시 신문, 잡지에 나온 자신들도 모르는 팀 해체설에 정말 불안해했다고 한다.
막연한 불안을 깬 건 멕시코에서 헤어지고 약 10개월 뒤인 1990년 마지막 날, 일본 도쿄 돔 공연에서였다. 리치 샘보라는 이날 공연을 계기로 밴드가 다시 뭉칠 수 있었다고 술회, 마치 멤버들 간 신뢰 회복을 가리키는 듯 'Keep the Faith'라는 다음 앨범 제목이 그때 언급되었다고 기억했다.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밴드 해체를 걱정하고 있었을 본 조비 매니지먼트와 에이전트사는 이때다 싶었는지 다음 앨범 작업을 적극 권했고, 존은 멤버들과 함께 바하마 제도로 떠났다. 출발하던 날, 그는 가족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주말 전에 집으로 돌아오면 밴드는 해체된 거야. 나는 솔로 활동을 할 거고. 하지만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밴드의 미래에 관한 논의 중이라고 생각해.
팀워크를 강조하듯 '으쌰으쌰' 분위기를 전하는 《Keep the Faith》 표지 사진 뒤에는 저러한 밴드의 일촉즉발 상황이 있었다. 다행히 존은 바하마 제도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본 조비는 다음 앨범을 준비하게 된다. 다만 깔끔한 새 출발을 생각했는지 《New Jersey》 시절까지 함께 한 매니지먼트/에이전트사, 고정 변호사 등 기존 관계는 모두 정리한 채였다.
밴드의 메인 송라이터 존과 리치는 뉴올리언스, 애틀란타, 플로리다, 내슈빌 등을 돌며 함께 곡을 만들어 나갔다. 이때 쓴 곡들이 앨범에 모두 수록되진 않았지만, 그 과정은 이전보다 더 깊어진 둘 사이를 선물했다. 91년 말 뉴저지 자선 콘서트를 끝낸 밴드는 존, 리치, 데이비드 브라이언키보드, 그리고 오랜 송라이팅 파트너인 데스몬드 차일드가 협업해 뽑아낸 30곡 정도를 들고 프로듀서 밥 록과 함께 밴쿠버 리틀 마운틴 사운드 스튜디오Little Mountain Sound Studios로 들어갔다. 메탈리카가 블랙 앨범을 만들 때 밥 록과 들른 곳이다.
본 조비 5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꿈 속에서, 모든 사람은 영웅이다"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말로 시작하는 뮤직비디오를 가진 <Dry County>로, 노랫말은 오토바이를 타고 텍사스를 여행하던 중 들른 작은 마을에서 존이 겪은 실화다.
그는 한 술집에서 석유를 캐러 온 남자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그곳에 석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하던 차였다. 존은 저들에게서 자신의 처지를 보았다. 왜 나는 이 일음악을 하게 됐는지 등 본 조비의 리더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재발견한 것이다.
본 조비로선 이례적으로 현대 사회 병폐를 담은 타이틀 트랙 <Keep the Faith>를 비롯해
앨범엔 그래서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지, 또 몇 걸음 물러서서 본인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내는 따위 소재들로 가득하다.
밥 록의 권유로 스튜디오에서 연주한 피아노 인트로와 중후반부 바뀐 템포에 올라타는 리치의 뜨거운 기타 솔로가 압권인 대곡 <Dry County>는 <I Believe>, <Keep the Faith>, <In These Arms>, <Bed of Roses>, <I Want You>와 함께 내가 자주 들은 이 앨범의 베스트였다.
모두 이 밴드의 제2막을 열어준 '모던 본 조비'를 대표한 곡들이었고,
이 성향은 다음 앨범 《These Days》까지 무난히 이어진다.
베이시스트 알렉 존 서치는 《Keep the Faith》를 끝으로 밴드를 떠나는데,
그의 자리는 2015년작 《Burning Bridges》까지 공석으로 남는다.
멤버 간 믿음faith이 엿보이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