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뚱뒤뚱 알바트로스

내가 날 수 있는 곳.

by 유무하

아주 오래전 내가 경전처럼 들고 다니던 시집 두 권이 있었다.


하나는 김승희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

또 하나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다.

(김승희 시인을 나는 한국의 보들레르라 생각했다)


이들의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다.


오늘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나오는 '알바트로스'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알바트로스는 날개가 가장 긴 새다.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은 경이로움 자체다.

(실제로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몸집이 크고 다리가 짧아 지상에 내려와 걸으면 하늘을 날던 품위는 사라진다.


창공의 왕자 알바트로스

하지만 선원들에게 잡혀 뒤뚱거리는 모습은 볼품없고, 처량하기에 그지없다.

천재 시인 보들레르는 자신의 처지를 선원에게 잡힌 알바트로스에 비유한다.


알바트로스
자주 뱃사람들은 장난삼아
거대한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바다 위를 지치는 배를 시름없는
항해의 동행자인 양 뒤쫓는 해조를.
바닥 위에 내려놓자, 이 창공의 왕자들
어색하고 창피스런 몸짓으로
커다란 흰 날개를 놋대처럼
가소 가련하게도 질질 끄는구나.
이 날개 달린 항해자가 그 어색하고 나약함이여!
한때 그토록 멋지던 그가 얼마나 가소롭고 추악한가!
어떤 이는 담뱃대로 부리를 들볶고,
어떤 이는 절뚝절뚝, 불구자 흉내 낸다!
시인도 폭풍 속을 드나들고 사수를 비웃는
이 구름 위의 왕자 같아라.
야유의 소용돌이 속에 지상에 유배되니
그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방해하네.



난 삶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이 뒤뚱거리거나 절뚝거리고 있다고 느껴질 때, 늘 이 시가 생각났다.

좋아하던 연예인이나, 잘 나가던 정치인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질 때도 이 시가 생각났다.

자신이 잘하는 일을 놔두고, 잘 못하는 일을 하며 힘들어하는 사람을 볼 때도 이 시가 생각났다.



우리는

살고 있는 장소가 중요하다.

우리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

어떤 곳에서는 품위를 지키고 날아갈 수 있는데,

어느 곳에서는 뒤뚱거려야 한다.

우리는 어쩌면 알바트로스일지도 모른다.

(아닐 수도 있으니 당장 날개를 펴지는 말자)

계속 뒤뚱거리고, 조롱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이 품위 있는 새를 생각하자.


내가 날 수 있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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